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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의 확장과 비잔틴 제국이 이슬람화 된 원인에 대한 고찰[考察]

유해석(총신대학교 선교대학원, 조교수)

 

국문초록

전 세계적으로 이슬람 인구는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1930년에 전 세계인구가 20억 명이었을 때, 이슬람 인구는 23백만 명으로 서 전 세계인구의 10.2%였으나 2023년 전 세계인구는 80억 명인 데 이슬람 인구는 20억 명으로서 전 세계인구의 25%가 되었다. 지 난 93년 동안 전 세계인구가 4배 증가할 때, 이슬람 인구는 약 10배 증가했고, 인구대비로는 2.5배 빠르게 성장하였다. 한국에도 다 문화, 다인종, 다종교 사회가 되면서 외국인 인구가 200만 명을 넘 었고 이슬람 인구도 성장하고 있다. 따라서 이슬람과 함께 공생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진지하게 배워야할 때가 되었다.

역사 속에서 이슬람과 기독교는 사랑의 화합의 관계는 아니었고 오히려 긴장과 갈등의 관계로 점철되어왔다. 한국에서 기독교와 이슬람과의 만남이 파국으로 치닫지 않기 위해서는 바른 역사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

본 연구는 이슬람이 확장과 비잔틴 제국이 이슬람화된 원인을 고찰하였다. 이슬람의 확장에 대해서는 첫째, 무함마드의 죽음과 이슬람의 성장, 둘째, 십자군 전쟁, 셋째, 콘스탄티노플의 멸망을 고찰하였고, 비잔틴 제국이 이슬람화된 원인은 첫째, 비잔틴 제국과 페르시아의 오랜 전쟁, 둘째, 기독교 이단자들의 이슬람과의 협력, 셋째, 이슬람의 딤미 제도, 넷째, 십자군 전쟁의 여파, 다섯째, 동서 로마의 분열에 대하여 고찰하였다.

기독교와 이슬람이 과거와 같은 불행한 역사를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서는 과거의 역사를 통해서 지혜를 얻고 이를 바탕으로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주제어: 이슬람, 기독교, 비잔틴 제국, 딤미, 십자군, 콘스탄티노플

 

 

. 들어가는 글

이슬람 인구는 지금으로부터 불과 50년 전인 1970년대까지만 해도 기독교 인구의 절반이 채 되지 않은 종교였다. 그러나 세계선교 통계에 의하면 2023년 현재 전 세계인구의 80억 명 가운데 기독교는 약 26억 명, 이슬람은 20억 명으로 급속도로 따라 잡히고 있는 실정이다. 미국 퓨 리서치 센터(Pew Research Center)가 발표한 미래에 그친 기독교에 비해서 2배 이상 높다. 이 같은 추세가 계속된다면 2070년에 두 종교가 동일한 비율을 차지하고 그 이후에는 이슬람 인구가 기독교를 제치고 1위에 오를 것으로 전망하였다.

이러한 세계 추이는 한국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한국 사회는 현저히 낮은 출산율로 인하여 인구가 감소하고 있다. 이미 인구통계 학자인 데이비드 콜먼(David Coleman) 옥스퍼드대 교수는 저출산으로 인한 인구소멸 국가 1가 한국이 될 것이라고 지난 2006년 경고하기도 했다. 그가 경고했던 2006년 한국의 합계출산율 즉 여성 1명이 가임 기간 평생 출생아 수는 1.13명에서 20220.78명으로 더욱 감소하였다. 또한 고령화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다. 고령화 사회는 65세 이상의 인구가 14%인 사회를 말한다. 2026년에 인구의 20%가 고령화된 초고령화 사회로 진입하고 2050년에는 인구의 46%를 넘어설 것이다. 저출산과 고령화로 인하여 노동 인력이 부족하자 이주 노동자들과 함께 무슬림 이주 노동자들도 입국하고 있다. 또한 20186월 예멘 출신 난민들이 제주도에 입국하여 이로 인한 사회적 논쟁이 있었다. 그런가 하면 2021년 이슬람 원리주의자 단체인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하자 많은 난민들이 발생하자 한국도 380명의 아프가니스탄 난민들을 특별공로자 자격으로 국 내로 이송하였다.

이렇게 한국에서 갑작스럽게 증가하는 이슬람 인구와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는 이슬람 테러와 맞물려 한국교회의 무슬림에 대한 태도는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난다. 이슬람에 대한 관용과 이슬람 포비아(Islamphobia)이다. 그리고 교회가 이슬람에 대한 두려움을 느낀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두려움은 이미 이슬람이 태동하면서부터 서방교회가 느꼈던 두려움이었다. 역사적으로 기독교가 복음의 능력을 상실하고 영적으로 공백인 상태에서 이슬람이 태동하였고 이슬람이 시작된 7세기 초반부터 16세기까지 기독교와의 갈등은 지속되었다.

따라서 본 연구는 7세기 무함마드의 지도력 아래에서 이슬람이 성장하게 된 과정에서 기독교에 대한 이슬람의 이해와 기독교와 갈등하게 된 종교적 배경 그리고 서로마 제국에 의한 십자군 전쟁과 비 잔틴 제국의 심장과도 같았던 콘스탄티노플의 멸망한 원인과 비잔틴 제국 이슬람화된 원인을 고찰하고자 한다.

본 연구와 관련된 논문은 주승민 교수의 콘스탄티노플 쇠퇴의 원인과 배경이 있다. 주 교수의 논문은 영국의 역사학자 스티븐 런치만(Stevenson Runciman, 1903-2000)의 저서 콘스탄티노플의 몰락(The Fall of Constantinople 1453) 을 바탕으로 콘스탄티노플 멸망 원인을 헬라, 슬라브, 튀르키예 및 서방의 자료들을 근거로 다양한 시각에서 연구하였으며 나아가 동서 로마의 관계를 연구한 좋은 자료가 된다. 반면 필자의 연구는 콘스탄티노플의 멸망뿐만 아니라 이를 확장하여 이슬람과의 관계 속에서 비잔틴 제국이 이슬람화된 원인까지 고찰하고자 한다.

 

 

. 이슬람의 확장

본장에서는 무함마드의 생애와 함께 시작된 이슬람이 확장되는 과정을 세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첫째, 무함마드의 죽음과 함께 이슬람이 빠르게 성장하는 과정에서 가장 먼저 기독교가 국교였던 비잔틴 제국과 충돌하게 되는데, 기독교에 대한 이슬 람의 시각을 꾸란과 비교하면서 살펴볼 것이다. 둘째, 이슬람이 확장하면서 서로마가 위협받자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십자군 전쟁은 잘 알려진 역사적 사실이다. 논자는 십자군 전쟁뿐만 아니라 십자군 전쟁 중에 일어난 이슬람 선교를 언급할 것이다. 셋째로 동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의 멸망을 고찰하고자 한다.

 

1. 무함마드의 죽음과 이슬람의 성장

이슬람은 610년 무함마드에 의해 아라비아반도에서 시작되었으며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헤자즈(Hejaz) 지역을 종교적·군사적으로 정복하는데 20년이 조금 넘게 걸렸을 뿐이다. 그중 마지막 3년 동안 아라비아반도 대부분을 정복했다. 628년 무함마드는 사신을 통하여 헤라클리우스, 코스괴르, 알렉산드리야의 대주교, 에디오피아의 네구스 왕, 갓산의 하리스 왕, 코스쾨스의 예멘지방 총독 등에게 편지를 전달하였다. 그 편지는 이슬람의 탄생을 알리고 그들에게 이슬람을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이슬람에 의하여 고통을 당하든지 선택하라고 알리는 내용이었다. 무함마드 생애의 마지막 전투는 기독교 제국이었던 비잔틴 제국과의 전투였다. 비잔틴 제국의 황제 헤라클리우스(Heraclius, 575-641)10만 명의 병력을 끌고 무함마드 군대와 맞섰다.

비잔틴 기독교 제국을 점령해 나가기 위하여 기독교에 대하여 이슬람이 어떤 시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꾸란의 1장을 알파티하’(al-Fatihah)라고 하는데 이는 무슬림들에게 가장 많이 읽혀지며 예배할 때, 가장 먼저 시작하는 대표적인 내용이다. 꾸란 117절인데, 7절에 노여움을 받은 자나 방황하는 자들이 걷지 않는 가장 올바른 길입니다.”라는 구절에 대하여 13세기 꾸란 주석가 이븐 카티르(Ibn Kathir, 1300-73)는 그의 주석에서 두 개의 길은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이다. 유대인들은 알라의 저주와 진노를 받았고, 기독교인들은 많은 이들을 잘못 인도했고 옳은 길에서 떠나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븐 카티르는 계속해서 무함마드가 이 구절의 의미를 분명히 했던 하디스(Hadith)를 인용하였다. “[무함마드]가 말했다. 노여움을 받은 자는 유대인이고 방황하는 자는 기독교인이다.” 무슬림들은 꾸란 1장을 읽을 때마다 이슬람의 길은 기독교인이 걷지 않는 길임을 확인한다.

이슬람으로 개종하지 않는 유대인과 기독교인은 불지옥에 가게 되며(꾸란 98:6), 무함마드는 이슬람식 예수인 이사(Isa)가 재림할 때, 그는 기독교를 파괴하고(십자가를 부수고) 이슬람의 지배 아래에서 살게 될 것이다. 더 이상 지하드는 없을 것이다. 이슬람 학자들은 이 하디스를 이사[예수]는 무슬림의 선지자로서 기독교인들을 강제하고 다른 신앙을 가진 자들을 칼의 관점으로 이슬람으로 개종시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했다.

 

아부 후라이야(Abu Huraira)가 낭송했다: 알라의 메신저[무함마드]가 말했다. ‘내 영혼이 손에 있는 그에 의해, 진실로 마리아의 아들[예수]은 너희 가운데[무슬림] 곧 재림할 것이며 인간을 꾸란의 율법으로 의로운 심판을 할 것이다. 그는 십자가를 부수고 돼지를 죽이며 그곳에 더 이상 인두세를 없게 할 것이다.’

 

결국 예수의 재림과 함께 유대교와 기독교는 멸망한다는 것이다. 꾸란에서는 무슬림이 최고의 피조물이며 우월하고 유대인과 기독교인을 대부분 사악한 자들로 본다. 무함마드가 자신의 생애의 마지막에, 즉 아라비아반도에서 자신의 지배력을 확보했을 때, 기독교인에 대한 배제도 결정적으로 실행되었다(꾸란 5:51). 또한 그 신학의 정당성을 꾸란 929절부터 35절에서 확보하였는데 여기에서 무함마드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기독교인에 대한 그의 최종적인 태도를 문서상으로 확정했다. 결국 유대인과 기독교인은 피보호민의 지위에 처하게 되었다.

이슬람 군대에 의하여 점령된 지역은 시간이 지나면서 이슬람화되어 갔다. 기독교인들은 피정복인이 되며 딤미(Dhimmi) 보호받는 백성이 되었다. 그 이유는 이슬람이 모든 종교에 대한 우월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꾸란 9:33, 61; 9:28, 48 참조). 꾸란의 명령에 따라서 인두세를 무슬림 정부에 납부해야 했다.

이집트가 이슬람 군대에 의하여 함락당한 후에 이집트의 콥트교 사제였던 니끼우 요한(John of Nikiu, 625-700)의 기록에 의하면 인두세는 최저 비용은 1디나(12디르함)이었지만 최대치는 정해진 바가 없었다. 이슬람 지도자의 필요에 따라서 세금을 올리곤 하였다. 그는 기록하기를 이슬람 정부는 인두세를 세 배로 올렸습니다. 그리고 많은 소유를 강제로 빼앗겼고, 농민들에 대한 세금을 두 배로 늘렸습니다. 그들은 말을 위해 강제로 사료를 운반하게 하였고, 셀 수 없는 많은 폭력을 저질렀습니다.”

인두세를 지불하지 못할 경우에는 이슬람으로 개종을 하거나 자녀를 노예로 내놓아야 했다. 그로 인하여 기독교인들은 피폐해 져갔고 이슬람으로 개종하였다.

이슬람의 성장은 열렬한 선교 활동의 결과일 뿐 아니라 수많은 전쟁의 결과라는 점이 중요하다. 이슬람의 정복 확립과 7세기 초기 비옥한 초승달(Fertile Crescent)에서 비잔틴군이 철수한 이후에 7세기 중엽부터 11세기 말까지 전 세계 기독교인이라고 고백하는 기독교인들의 약 50%가 무슬림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이 점에 대한 또 다른 증거는 다음과 같다.

 

이슬람 군대는 북부 아프리카를 강화한 후에 유럽으로 정복을 확대해 나갔다. 이탈리아 남부의 시실리(Sicily)652년에 침략당했고, 스페인과 포르투갈(-안달루스)10세기까지 사실상 이슬람 국가였다. 그들은 8세기에 스페인 주둔지에서 프랑스 남부의 아키텐까지 공격하였으나 732년에야 칼 마르텔(Karl Martel, 688-741)이 투르(Tours)와 푸아티 전투(Battle of Poitiers)에서의 승리를 통해서 이 지역의 이슬람 확산을 종식시킨다.

 

만일 이 전투에서 패배했다면 유럽 전체는 이슬람화가 되었을 것이다. 남부 이탈리아는 827년 이후 아랍인들과 베르베르인들에 의해 정복되었고, 965년에 시칠리아의 에미르(Emirate of Bari) 왕국이 설립되었다. 그들은 1072년 노르만인들에게 추방될 때까지 이 지역을 지배했다. 서유럽의 무슬림 통치는 동유럽보다 짧았고, 718 년부터 1492년까지 약 7세기 반에 걸쳐서 이베리아반도 북부의 가톨릭 왕국들이 이베리아반도 남부 이슬람 국가를 축출하고 이베리아반도를 회복하였다.

 

2. 십자군 전쟁

첫 번째 십자군에 대한 교황령은 846년에 교황 레오 4(Pope Leo , 재위 847-855)에 의하여 선포되었다. 그때 이슬람이 다스리던 시실리(Sicily)로부터 약 73척의 배와 약 만 명의 군인들이 테베 레와 로마를 공격하였다. 그들은 성 베드로 바실리카 교회(Basilica church)와 테베레에 있는 성 바울 교회를 약탈하였다. 그로 인하여 프랑스에서 종교회의가 열렸다. 그 회의에서 영주들에게 기독교의 적을 대항하는 군대를 모을 것을 요청하였다. 교황은 무슬림과 싸우다가 죽는 이들에게 면죄부를 약속하였다. 전쟁에서 적들로부터 배우고, 효과적인 방법들을 선택하는 것은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2세기 반 동안 이슬람 군대와 많은 전투를 하였다. 이슬람을 대항하는 십자군 전쟁에 참전하다가 죽은 이들에게 면죄부를 약속하는 것은 무슬림들에게 배운 것이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십자군은 1071년 셀주크 투르크 군대가 콘스탄티노플 군대를 격파한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비잔틴 황제 알렉 시우스 1(AlexiusComnenus, 1056-1118)는 셀주크에 위협을 느껴서 서로마에 군사적 원조를 요청하였다. 1095년 교황 우르반 2(Urbanus , 1035-1099)가 클레르몽 공의회(Council of Cler- mont)에서 동로마의 구원뿐 아니라 성지 예루살렘의 회복을 위한 대원정군 조직을 역설하였다. 무슬림들의 손에서 성묘(聖墓)를 해방하자고 호소했는데 이것은 일종의 기폭제 같은 효과를 가지고 왔다. 기사들이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신다.’(Deus lo volt)고 외치면서 후에 십자군의 상징이 된 십자가를 들고 집단으로 몰려들었다. 성지의 매력과 예루살렘이 1077년 셀주크인들이 점령한 이래 겪고 있는 곤경을 잘 알려져 있던 터에 우르반 2세는 교황권의 위세를 높이고 투르크족을 공격하여 성지를 찾고 비잔틴 교회를 로마교회와 통합할 기회로 보았다. 또한 우르반 2세 그레고리 7(Gregorius , 1020-1085)가 하인히리 4(Heinrich , 1050-1106)와의 서임권 분쟁에서 승리를 하고도 하인리히 4세의 군사력에 굴복하여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것을 보고 교황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군사력이 필요함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이와 함께 십자군을 통한 예루살렘 성지탈환은 토지에 굶주리고 모험을 좋아하는 봉건영주들과 경제적 곤궁으로 압박받고 종교적으로 고양된 서로마 사람들을 감동하게 했다. 이에 따라서 제1차 십자군 30만 명이 유럽 각지에서 출발하였다.

1096년 말부터 대영주들이 콘스탄티노플에 집결하였다. 십자 군이 거둔 최초의 성과는 10976월에 니케아를 점령한 것이다. 109863일 십자군은 안디옥(Antioch)을 점령하였다. 보두앵 (Baudouin, 1065-1118)은 북부 메소포타미아로 돌진하여 에데사(Edessa)를 중심으로 자신의 제후령을 세우기도 하였다. 십자군 은 1099615일 예루살렘을 점령한 후, 십자가를 짊어진 기독 교인들은 일주일 동안 무슬림들과 유대인을 학살하고 모스크와 회 당을 불태웠다.

1144년 십자군은 모술(Mosul)에 강력한 이슬람 국가를 세운 셀주크의 통치자 장기에게 에데사를 빼앗겼다. 에데사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유럽에 전해지자 교황 유게니우스 3(Eugenius , 1145- 1153)는 제2차 십자군을 소집했다. 이 제2차 십자군 원정 동안 독일 황제 콘라트 3(Konrad , 1093-1152)와 프랑스 왕 루이 7(Louis , 1120-1180)가 이끄는 군대가 1148년 봄 예루살렘에서 연합해 5만 명의 병력으로 다마스쿠스 북쪽을 공격했다. 그러나 치욕스러운 패배로 끝났다.

1187년 살라딘(Saladin, 1138-1193)에 의한 예루살렘 함락에 충격을 받은 교황 그레고리우스 8(Gregorius , 1100-1187)는 제3차 십자군을 소집했다. 1191년 영국의 리처드 1(Richard, 1157-1199)는 비잔틴 속주 키프로스(Cyprus) 섬을 점령한 뒤, 본토의 아크레(Acre)를 공격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도착하는 데 실패한 후, 1192년 리처드 1세는 살라딘과 5년 동안 유럽인의 성지순례를 허용한다는 내용의 강화조약을 맺었다.

1198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3(Innocent , 1160-1216)가 이집트를 공격하기 위해 소집한 제4차 십자군 원정은 예기치 못한 양 상으로 전개되었다. 십자군은 베네치아에서 들여온 배와 장비의 대금을 지불할 수 없게 되자, 이슬람을 공격한 것이 아니라 1204413일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도시를 약탈했다.

십자군 역사에서 가장 비참했던 것은 1212년의 소년 십자군이었다. 이 소년 십자군은 성지는커녕 마르세이유(Marseille), 정확하게 말하면 브린디지(Brindisi)에서 이때 참여한 수천 명의 소년이 대부분 죽거나 노예로 팔려갔다.

3년 후에 제5차 십자군은 1219년 예루살렘 성지와 상관없이 이집트 나일강 근처의 다미에타(Damietta)를 점령했다. 그러나 홍수를 만나 카이로로 진격하지 못하고 있던 상황에서 이슬람 선교 역사에 의미 있는 사건이 전개되었다.

 

12197월 다미에타에서 아시시의 프란체스코(Francis)와 이집트의 술탄인 알-카밀(Al-Malikal-Kamil)의 역사적인 만남이 이루어졌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10:16) 프란체스코는 칼을 거부하고 무슬림이 하나님 앞에서 사랑받는 존재라는 전제하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였다. 당시 교황청 이 군사적인 십자군에 헌신되어 있을 때에 프란체스코는 술탄과 만나서 고귀한 사랑을 나누기 위하여 헌신했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술탄은 후에 기독교인들에게 영토의 일부를 나눔으로써 십자 군과 협상을 시도한 첫 번째 지도자였다. 분명히 프란체스코는 이러한 변화의 연결고리가 되었을 것이라고 본다.

 

프란체스코는 역사상 최초로 무슬림에게 다가가서 기독교 복음을 전했던 인물이다. 이 사건을 시작으로 무슬림을 향한 선교가 시작되었다는 데 의미가 있다. 프란체스코는 십자군을 격려하지 않았고 도리어 십자군은 전투에서 패배할 것이라고 경고를 하는 등 십자군과 다른 행보를 보였다.

1248년 프랑스 왕 루이 9(Louis , 1214-1270)는 다시 원정에 나섰다. 그러나 이 제7차 십자군도 제5차 십자군처럼 이집트에서 패배했다. 루이는 22년 뒤 마지막 십자군인 제8차 십자군을 이끌고 출전했으나, 튀니지에 상륙한 직후 대부분의 군대와 함께 병에 걸려 죽었다. 결국 술탄 바이바르스(Baybars, 1223-1277)는 마침내 1291년 예루살렘 왕국의 수도였던 아코(Akko)를 점령함으로써 십자군 전쟁은 실패로 끝났다.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십자군의 본래 종교적인 원동력은 전쟁과 모험심, 피를 보려는 잔인함, 약탈욕, 권력욕으로 바뀌면서 빠르게 퇴색되었다. 십자군 전쟁은 눈물과 헌신과 순교의 역사로 점철되었던 기독교 역사에서 성지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무슬림을 본받아서 칼로 무장하여 그리스도의 섬김과 헌신에 반대되는 무참한 학살과 약탈로서 기독교의 본질을 변질시킨 전쟁이었다고 본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역사 속에 기록된 무슬림을 향한 최초의 복음 전파가 있었다는 것은 의미 있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3. 콘스탄티노플의 멸망

콘스탄티노플의 멸망은 천년동안 이어온 비잔틴 제국의 멸망을 의미한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세계사는 중세와 근대로 나뉘게 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킨 오스만 터키의 조상인 오구즈 투르크(Oghuz Turks)족은 10세기경 무슬림 세계의 변방이었던 카스피해와 아랄해 북쪽인 오우즈 연맹의 야브구(Yabghu) 칸국에 살던 사람들로, 셀주크(Seljuq) 가문은 이들의 분파였다. 11세기에 셀주크 일파는 조상 대대로 살던 땅을 떠나 아나톨리아(Anatolia) 동부로 이주하였는데 그곳이 새로운 터전이 되었다. 셀주크의 승리로 아나톨리아의 셀주크 술탄국이 부상하여, 중앙아시아 일부와 이란, 아나톨리아, 서남아시아를 아우르던 셀주크 제국의 개별 분파로 성장하였다. 1243년에 셀주크 군대는 몽골인들에게 패배하고, 제국의 패권은 점차 무너지게 된다. 이후 오스만 1(Osman, 1258-1326)가 지배하던 일개 투르크 공국이 200년 이 넘는 세월 동안 발전하여 아나톨리아와 발칸 반도, 레반트를 아 우르는 오스만 제국이 되었다. 기독교의 적수로 이름을 떨친 오스만은 스스로 지하드 전사(戰士)로 자처하였다. 비잔틴 군사들을 격파하면서 그의 명성이 알려지면서 수많은 지하드 전사들이 그 주위에 몰려들었다. ‘지하드 전사의 전쟁은 기독교의 땅’(Dar al-Harb)을 빼앗아 무슬림의 땅’(Dar al-Islam)의 확대를 목표로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지하드 전사의 이상에 헌신한 병사들은 오스만과 그의 가문의 권위를 인정하여 오스만인이 되었고 퇴락하는 비잔틴 세력에 압력을 가하였다.

오스만 제국은 무라드 2(Murad , 1404-1451)가 책략과 외교와 군사력을 적절하게 구사하여 오스만의 위상이 강해져갔다. 무라드 2세의 아들 즉 오스만 제국의 7대 술탄(sultan) 메흐메드 2(Mehmet , 1432-1481)1444년부터 1446년까지 짧은 기간 통치하다가 퇴위 되고 1451년부터 다시 즉위하였다. 오스만 전통에 의하면 술탄은 자신의 치세를 거창한 지하드로 시작하곤 하였다. 이슬람의 지하드의 전사를 자처하는 메흐메드 2세는 비잔틴 제국의 마지막 땅인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기 위하여 모든 화력을 집중하였다. 콘스탄티노플은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쌓여 있고 육지와 이어져 있는 세 겹의 성벽이 높이 솟아있다. 옛날의 게 르만족, 훈족도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을 넘지 못했다. 그러나 강력한 대포로 무장하고 철저하게 준비한 메흐메드 2세는 오스만 터키 16만 명의 전군에게 총공격을 명하였다. 콘스탄티누스 11세는 1452년 가을에 절박한 도움을 간청하기 위하여 로마 교황청에 대사를 보내서 지원병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반응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정치적 교만으로 완고하였다. 결국 로마로 갔던 사절단은 바쁜 일정을 보냈으나 145341일 몰락한 콘스탄티노플에 돌아가지 못하는 실정이 되었다. 로마의 태도를 본 동로마 황제의 측근인 루카스(Loukas Notaras, 1402-1453)1453329, 비잔틴 최후의 날에 로마 추기경의 모자보다, 술탄의 터번을 곧 보기 원한다.”고 말하게 되었다. 무너지는 콘스탄티노플을 막던 콘스탄티누스 11세 황제는 도망가지 않고 백병전 속으로 뛰어들어 동로 마 천년의 최후와 함께 했다.

천년동안 무너지지 않아 섬으로 남은 콘스탄티누스의 도시라 는 이름에서 나온 콘스탄티노플은 도시로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 이스틴폴린’(eis tin polin)에서 유래한 이스탄불’(Istanbul)로 바뀌었다.

지금까지 이슬람이 확장되어가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다음 장에 서는 비잔틴 제국이 이슬람화 된 원인을 고찰하고자 한다.

 

. 비잔틴 제국이 이슬람화 된 원인

지금까지 이슬람의 확장과 비잔틴 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 노플의 멸망을 살펴보았다. AD 330511일 콘스탄티노스 1(Constantinus, 272-337)에 의하여 세워졌던 콘스탄티노플은 AD 1453529일 콘스탄티노스 11(Constantinus ⅩⅠ, 1405- 1453) 때 멸망하면서 기독교 지역은 모두 이슬람으로 대치되었고 그곳에 살던 기독교인들은 일부만 남고 이슬람으로 개종하면서 오늘날 이슬람 국가들이 되었다. 그렇다면 그 넓은 비잔틴 기독교 제국이 왜 이슬람화 되었는지 다음 다섯 가지 이유를 들어서 고찰하고자 한다. 첫째 원인은 비잔틴 제국과 페르시아의 오랜 전쟁으로 인하여 피폐해 져갔고, 둘째는 비잔틴 제국 안에서 박해받던 기독교 이단들이 이슬람과의 협력하면서 무너졌고, 셋째는 기독교인에 대한 이슬 람의 딤미 제도로 인하여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게 되었고 넷째는 십자군 전쟁의 여파로 인하여 동로마 제국이 약화되었으며, 다섯째는 동·서로마의 분열로 인하여 비잔틴 제국은 이슬람화 되었다는 것이다.

 

1. 비잔틴 제국과 페르시아의 오랜 전쟁

콘스탄틴 대제의 기독교 공인은 고대 로마 제국에서 비잔틴 제국을 포함한 중세 그리스도교 시대의 전환을 이룩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AD 330511일 로마의 수도를 콘스탄티누스의 수도 즉 콘스탄티노플로 옮기는 기념식이 있었다. 콘스탄티노플은 지중해와 흑해를 잇는 좁은 보스포루스 해협에 면해 있는데 아시아와 유럽의 경계에 위치하고 항구에 적합한 후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 도시가 가지는 지리적 중요성과 군사적 이점은 컸다. 유스티아누스 1(Justinianus, 482-565)는 게르만족에게 빼앗긴 서로마 제국의 영토를 회복하기 위하여 정복 전쟁을 시작하였다. 그의 꿈이 어느 정 도 실현되었으나 그의 죽음 이후에는 페르시아와 전쟁을 치러야 했다. 헤라클리우스(Heraclius, 575-641) 황제 즉위 당시 제국은 절망적인 상태였다. 613년에서 614년 사이에 페르시아에 대패하면서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잃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페르시아는 이집트를 점령하였다. 시리아는 실크로드의 거점이었고 이집트는 지중해의 가장 풍요로운 곡창지대였다. 헤라클리우스는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622년부터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고 627년에는 오늘날 북부 이라크의 모술(Mosul) 지역을 점령하고 페르시아와 강화조약을 맺었다. 628년 헤라클리우스는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왔다.

러나 당시 양대 문명으로 패권쟁탈을 벌이고 있던 양대 제국의 국력은 쇠퇴하고 있었다. AD 632년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가 사망한 이후 무슬림 세계는 아라비아반도를 넘어서 비잔틴 제국을 정복해 나갔다. 비잔틴 제국이 페르시아와의 전쟁으로 인하여 국력이 쇠약해진 틈을 타서 636년 비잔틴 제국의 영토였던 시리아를 정복하였고, 637년에 예루살렘을 정복하였다.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641년 전의를 상실한 채 고통받다가 죽었다.

 

2. 기독교 이단들의 이슬람과의 협력

단성론자들은 에베소공의회(431)에서 네스토리우스가 이단으로 정죄되면서 그를 따르던 안디옥 지역을 중심으로 이단이 되었고, 칼케돈공의회(Chalcedon, 451)에서는 이집트의 콥트교회가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비잔틴 제국 안에는 많은 이단이 있었는데, 영지주의, 마르키온주의, 에비온파, 몬타누스주의, 펠라기안주의, 콥트교, 네스토리안 등이 있었다. 기독교 이단들이 비잔틴 제국의 박해로 인하여 비잔틴 제국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는 아라비아반도로 이주하였다. 이로 인하여 이슬람 형성에 거름이 되었다.

 

이슬람의 기록에 의하면, 무함마드가 12살 때 시리아의 보스라 에 방문했을 때 네스토리안 수도사 부하리(Buhari)를 만났다. 그 수 도사는 처음으로 무함마드가 선지자임을 무함마드의 삼촌에게 알렸다. 다마스커스 요한네스(John of Damascus, 676-745)는 무함마드가 아리우스 수도사로부터 정보를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많은 기독교 이단들이 유일신교 이슬람을 만드는데 영향을 주었다. 꾸란에서 구약성경을 차용한 대목이 전체 텍스트의 약 14%가 되며(이 수치는 전체 꾸란 6,346구절에 대한 성경 이야기가 언급된 876구절을 백분율로 환산한 것임 - 편집자주), 신약 성경을 차용한 것이 약 8%이다. “우리(알라)의 말씀을 거역하며 오만하고 거만 한 자 그들에게는 하늘의 문이 열리지 아니하며 그들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으니”(꾸란 7:40) 라는 내용은 누가복음 825절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다. 또한 그날 일부는 그들의 얼굴에 빛을 발하고 그들의 주님을 향하고 있고”(꾸란 75:22-23)는 요한일서 32절과 고린도전서 1312절을 떠오르게 한다. 이런 구절들이 무함마드에게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이슬람과 기독교의 교리의 유사성 때문에 비잔틴 제국에 억압받던 이단들은 비잔틴 제국 대신에 이슬람으로 정치적인 정권교체가 있었을 뿐 새로운 종교라고 인식하지 못했고 이슬람과 협력하면서 자연스럽게 이슬람화 되어갔다.

비잔틴 제국은 이단들에 대하여 세금을 부과하는 등 가혹한 처분을 내렸다. 또한 많은 기독교인이 이단들과 교류하느니 차라리 유배와 죽음을 택할 정도로 맹렬해졌다. 광신자들은 이단들이 모이는 교회당을 불태우고 이단들을 모독하였다. 이슬람이 비잔틴 제국을 침범했을 때, 이단으로 정죄되었던 단성론자들은 종교의 자유를 허용한다는 이슬람 군대를 마치 해방군으로 여겨 환영하고 비잔틴 기독교의 적들에게 도시의 문을 열어 주었을 정도로 이런 증오심이 널리 퍼져 있었다. 콥트 신앙을 유지하는 북아프리카의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이슬람은 비잔틴 제국에 비하여 훨씬 덜 억압적이었다. 이렇듯 당시의 기독교 이단들이 이슬람이 비잔틴 제국을 점령해 나가던 때에 이슬람에 협력함으로서 이슬람 군대는 비잔틴 제국을 빠르 게 점령해 나갈 수 있었다.

 

3. 이슬람의 딤미(Dhimmi) 제도

이슬람이 점령한 지역에서는 이슬람법 샤리아(Sharia)가 실행되지만 딤미에게는 딤미 법이 적용되므로 이를 아흘 알-딤마’(ahl al dhimma)라고 불렀다.

7-8세기 이슬람의 확장과정을 연구한 역사학자이자 꾸란 주석가 알타바리(al-Tabari, 839-923)636년 이라크의 바스라에 대한 공격을 묘사하고 있는데 이를 통하여 기독교에 대한 이슬람의 태도를 살펴볼 수 있다. 당시 이곳은 기독교 인구가 대다수였다. 우마 르(Umar ibn al-Khattab, 586-644)는 바스라의 군대 사령관에게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사람들에게 이슬람을 전파하라 이에 응답하여 이슬람으로 개종한 사람은 살려두어라. 거절한 사람은 모욕과 저주를 느끼며 인두세를 지불하도록 하라. 만일 그들이 거절한다면 자비 없이 죽여라. 너희에게 이 일을 맡기신 알라를 두려워하라.”

우마르가 다스리는 10년 동안 4천 개의 교회와 신전을 파괴하였고 1,400개의 이슬람 사원을 건축하였다. 또한 딤미는 무슬림들에 게 존경을 받으면 안 되었기에 그들의 복장도 무슬림들과는 달랐다. 9세기 이슬람 법관인 아하메드 탈립(Ahmad b. Talib)에 의하면, 딤미들은 하얀색 옷을 입고 어깨 부분에, 유대인들은 원숭이 표시를 붙여야 하고, 기독교인들은 돼지 표시를 붙여야 했다. 또한 유대인 집 문에는 원숭이 표시를, 기독교인 집 문에는 돼지 표시를 해야 했다. 그 이유는 꾸란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성서의 백성들에게 일러 가로되 우리가 알라와 우리에게 계시된 것과 이전에 계시된 것을 믿는다 하여 우리를 배반하느뇨 너희 대다수는 거역자들이라알라의 저주와 분노를 초래하는 그들과 그들 가운데 원 숭이나 돼지로 형상화된 그들과 우상숭배하는 그들이니라. 이들은 가 장 나쁜 곳에서 올바른 길을 벗어나 방황하리라(꾸란 5:59-60).

 

꾸란은 유대인을 원숭이로 기독교인을 돼지로 묘사하고 있다. 기독교인들은 정복당하고 굴욕을 당해야 하며 무슬림들은 내지 않는 세금을 납부해야 했다.

이러한 일들은 이슬람이 지배하는 전역에서 일어났기에 기독교인들이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기보다 실리를 택하여 이슬람으로 개종하였고, 과도한 인두세로 인한 비자발적인 개종이 일어났다. AD 1000년이 지나면서 기독교 인구와 무슬림 인구가 비슷해졌다. 점진 된 개종은 12세기 말에 이슬람 인구가 기독교 인구보다 많아지게 되었다.

 

4. 십자군 전쟁의 여파

예루살렘으로 가는 십자군의 도화선이 된 하나님이 이것을 원하신다.’(Deus lo volt)는 교황 우르반 2세의 연설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먼저 이단에 대한 어거스틴(Augustine, 354-430)의 주장의 출발점은 누가복음 1423절에 있었다. 하게만(Hagemann)은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여기에서 강권하여 데려다가’(compelle intrare)라는 말이 이단들에 대한 정의로운 전쟁론을 정당화했던 것이다. 누가는 아마 억지로라는 말을 가장 힘찬 선교적 실천을 가르치 는 것으로 이해했을지 모르지만, 교회의 역사가 흐르면서 이루 형언할 수 없는 난폭성으로 이어졌다.

 

어거스틴은 무력사용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타락과 약탈과 폭력을 휘두르는 도나투스파(Donatist)에 대한 교육상매에 비교할 수 있는 무력사용을 근거를 찾았던 것이다. 거기에도 조건이 있었다. 목적이 정당해야 하고, 올바르게 구성된 권위 있는 조직에 의하여 실행되어야 하고, 마지막으로 불가피한 와중에도 사랑이라는 동기가 중심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건은 충족하지 못하면서 무력사용을 했다는 데 문제가 있다고 본다.

그동안 예루살렘을 순례할 때, 순례자들의 상징인 지팡이와 보따리 외에 이제는 칼을 들게 되었으니 교회가 무기를 축복하는 일이 시작된 것이었다. 예수님은 자기를 잡으러 온 대제사장 종의 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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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른 베드로를 향하여 마태복음 2652절에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의 적으로 간주된 것에 대한 투쟁이라는, 기사들의 종교적 이데올로기가 작용하여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칼을 들고 무슬림을 죽이는 형태로 나아갔다. 특히 제4차 십자군 34,000명은 베니스에 도착해서 배를 빌릴 돈이 없자 베니스의 충독 엔리코 단도로(Enrico Dandolo, 1107-1205)의 꾀임에 빠져서 480척의 배를 타코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1204년에 자신들의 백작 볼드윈 1(Baldwin, 1172-1205)를 왕으로 옹립하여 라틴 왕국을 세웠다. 라틴 제국 시대는 콘스탄티노플의 암흑기였다. 1261년 미가엘 8(Michael , 1223-1282)는 콘스탄티노플을 베니스 십자군으로부터 되찾았으나, 십자군의 약탈과 횡포를 경험한 동방 사람들은 같은 기독교라고 해도 교황보다는 이슬람의 지배를 받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십자군과 베네치아인들은 술탄 메흐메드 2세에 의하여 함락될 때 보다 더 많은 동로마 사람들을 죽이고 라틴 제국을 건설하였다. 4차 십자군은 비잔틴 교회와 라틴 교회의 동맹 가능성을 완전히 파괴해버렸으며, 비잔틴 제국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혔다.

 

5. ·서로마의 분열

·서로마교회는 1054년 교리와 문화적인 이유로 서로를 파문하면서 분열하였다. 사도들이 사역하던 초대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연합을 경험하는 시기였다. 사도행전 15장에는 예루살렘에서 개최된 첫 사도 회의가 소개되었다. 기독교 신앙의 통일성을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모였다. 아마도 그 회의보다 더 이른 시기에 초대교회의 세례 의식과 무질서를 바로잡는 일이 있었다. 사도 회의는 베드로와 요한을 사마리아로 파송하여 세례와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시행되는 통일성을 견지한다. 바울은 14년 후에 예루살렘의 사도 회의에 참여하여 자신의 복음 전파와 사도들의 가르침과 연결하는 일치에 힘썼다. 또한 바울이 선교사역을 마치고 예루살렘 교회를 찾은 것은 자신이 전파한 그리스도의 복음이 사도들의 가르침과 일치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이것이 초대교회의 연합정신을 보여주는 중요한 근거이다. 또한 4-5세기경 니케아(Nicaea)와 칼케돈 종교회의(Council of Chalcedon)는 아리우스(Arius, 250-336)와 아다나시우스(Athanasius, 296-373) 사이에 기독론과 삼위일체론의 교리논쟁을 종식시키고, 이단을 다스리고 복음적인 교리의 가르침을 통일시키는 교회 연합과 일치의 노력을 보여준 사건이다. 그러나 동·서로마 교회는 9세기 동방교회의 대주교 포티우스(Potius, 820- 893)와 서방교회의 교황 니콜라스 1(Nicolaus, 800-867) 사이의 갈등으로 빚어졌고, 1054년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미가엘 셀 루라리우스(Michael Cerularius, 1000-1059)와 로마교황 레오 9(Leo , 1002-1054) 사이에 파문장 교환으로 동·서방교회는 공식적으로 갈라서고 말았다. 그렇다면 분열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1) 교황권 문제

서로마는 이방 민족의 계속된 침략으로 중앙집권적이고 군주적 구조로 강화되어 나갔다. 그래서 서방의 교황은 유일한 사도적 계승자로 인정되었고, 로마교황의 세력이 서방을 넘어 동방의 총대주교들에게 확장하려고 하는데 동방에서는 강한 반발이 있었다. 로마 교황청은 무오류성을 가진 특권으로 보았고, 동로마는 로마교황은 혼자가 아니라 교회의 모든 주교들의 공의회로 굳어진 최종결정을 신앙 안에서 얻는 것으로 보았다.

 

2) 성자에게서(Filioque)의 문제

삼위일체 교리에서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성령은 성 부에게서 나오신다.’로 명시적인 진술을 고백했으나, 성자와 성령의 관계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켰다. 그 후에 성자와 성령의 관계에 대한 논란이 있게 되면서 동·서 로마의 차이가 드러나게 되었다. 서로마는 589년 톨레도 공의회(Councils of Toledo)에서 성령은 성부에게서 그리고 성자에게서 영원히 나오신다.’(Spiritus Sanctus aeterne procedens a Patre Filioque)라고 수정하였다. 그리고 성자에게서 (Filioque)라는 라틴어 발음대로 이를 필레오케교리라고 칭한다. 그러나 전통을 중요시했던 동로마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3) 성상 숭배에 관한 문제

8세기와 9세기에 비잔틴 제국 안에 성상 파괴 운동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레오 3(Leo , 685-741)는 성상 숭배를 금지하는 칙령을 발표하였다. 성상 숭배 금지의 원인 중에 이슬람의 영향도 일부분 있었다. 이슬람의 칼리프 야지드 2(Yazid , 664-684)는 성화, 성상의 숭배를 비판했고 이것이 레오 3세에게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슬람의 요인은 둘째 치고, 출애굽기 204절과 5절에 성상과 그림으로 대표되는 우상을 금하고 초기 기독교인들 이 기독교인이라는 상징으로만 사용했던 전례가 있었기에 레오가 내린 726년의 칙령과 754년에 개최된 공의회에서 성상 제작과 숭배를 금지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 외에 사순절(Lent) 기간에 동로마는 육식을 금하고 누룩이 없는 빵을 먹도록 지도하였지만, 서로마는 누룩 없는 빵은 먹었지만 밀크, 버터, 치즈를 사용할 것을 허락하였다. 동로마는 일부 성직자의 결혼을 허락하였지만, 서로마는 결혼을 금하였다. 동로마는 성직자들이 수염을 기를 수 있었지만, 서로마는 성직자가 수염을 기르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서로마 교회의 분열은 종교적인 것과 문화적, 사회적 권위자들의 개인적인 이유도 큰 비중을 차지했다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 비잔틴 제국이 이슬람화된 원인을 다섯 가지로 살펴보았다.

 

. 나가는 글

지금까지 이슬람의 확장과 비잔틴 기독교 제국이 이슬람화된 원인을 살펴보았다. 이슬람의 확장에 대해서는 다음 세 가지를 말하였다. 첫째, 무함마드의 죽음과 이슬람의 성장, 둘째, 십자군 전쟁, 셋째, 콘스탄티노플의 멸망.

다음으로 비잔틴 제국이 이슬람화된 원인으로는 다음 다섯 가지를 말하였다. 첫째, 비잔틴 제국과 페르시아의 오랜 전쟁, 둘째, 기독교 이단자들의 이슬람과의 협력, 셋째, 이슬람의 딤미 제도, 넷째, 십자군 전쟁의 여파, 다섯째, 동서 로마의 분열이다. 여기서 언급한 이유들 외에 또 다른 이유들이 언급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이 같은 연구는 현재 우리가 겪는 현실상 계속되어져야 하겠다.

논문을 준비하면서 우리의 자리인 교회, 특히 한국교회에 대한 마음을 억누를 수 없다. 초대교회는 눈물과 기도와 헌신과 순교와 연합으로 예수의 삶을 실천하여 거대한 로마 제국을 기독교 제국으로 변화시켰으나, 제도화되고 정치화된 교회는 권력과 힘을 얻기 위하여 투쟁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기독교 제국은 서서히 무너지고 결국 오늘날 이슬람화 되었다.

본 연구는 전 세계에서 이슬람 인구가 빠르게 성장하고 있고 한국에서도 이슬람 인구가 성장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역사 속에서 이슬람의 확장과 비잔틴 제국이 이슬람화된 원인을 고찰하게 되었다. 이번 글에는 소개하는 정도에 머물게 되지만, 다음 기회에 좀 더 논쟁적인 주제를 다루게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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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e Expansion of Islam and the Reason for the Islamization of the Byzantine Empire

Yoo, Hae Seok (Chongshin University, Assistant Prof.)

 

Across the globe, the Muslim popularity is rapidly growing. In 1930, the coverage for Muslim population was 230 million, a 10.2 percentage out of the 2 billion world population. As of 2023, the coverage for Muslim population is 2 billion, which covers 25 percentage of the 8 billion world population. Over the past 93 years, the world population has increased 4 times the previous number, while the Muslim population has increased 10 times the previous number, showing a 2.5 times faster growing rate than the world population. As Korea became a multicultural country, it exceeded 2 million number in foreign population. This includes the Muslim population, where it is still constantly increasing today. Thus, the time to learn what it means to understand each other has now came.

Historically, Islam and Christianity have not been in a har- monious relationship, but rather punctuated with tension and conflict. For Korea to ensure its encounter with Christianity and Islam does not lead to disaster, a proper understanding of history is imperative.

This study examines the reasons for the expansion of Islam and the Islamization of the Byzantine Empire.

The expansion of Islam is studied in terms of:

1 Death of Muhammad and the growth of Islam

2 The Crusades;

3 The fall of Constantinople.

 

The reasons for the Islamization of the Byzantine Empire are explored in terms of:

1 Prolonged war between the Byzantine Empire and Per- sia;

2 Cooperation between Christian heretics and Islam;

3 Islam’s Dhimmi system;

4 Aftermath of the Crusades;

5 Division between East and West Rome.

 

For Christianity and Islam not to repeat their unfortunate past, Korea need to gain wisdom from history and prepare for the future based on it.

 

 

 

 

 

 

Key-words: Islam, Christianity, Byzantine Empire, Dhimmi, Cru- sades, Constantin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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