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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의 신화와 역사에서 보이는 기독교의 영향

 

 

유해석(총신대학교 선교대학원, 조교수)

 

 

 

 

국문 초록

 

이슬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은 오늘날 그리스도의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커다란 도전 가운데 하나이지만 기독교의 전통

으로부터 오는 암시를 통해서 배울 수 있다. 전 세계이슬람 인구는 1930년에 2억 3백만 명이었으나 매년 2.32% 증가하여 2020년에는 16억 명이 되었다. 이슬람 인구가 2억 4백만 명이었을 때는 매년 평균 4-5백만 명 정도로 증가했지만 16억 명이 되는 지금은 매년 3700만 명이 성장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이슬람 인구는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한국에 이슬람 인구가 얼마인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박성수의 연구에 의하면 한국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사람들의 73%가 기독교인들이다. 따라서 한국교회가 이슬람에 대한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이슬람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이슬람이 어떤 종교인지에 대한 이해가 시급하다. 한국에서는 이슬람을 타 종교로 인식하지만, 오랫동안 이슬람과 역사를 함께했던 비잔틴 제국에서는 이슬람을 기독교 이단으로 여겼다. 또한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존 칼빈(John Calvin), 하인리히 불링거(Heinrich Bullinger)와 같은 종교개혁자들도 이슬람을 기독교 이단으로 보았다. 

이러한 주제를 다루면서 먼저 이슬람에 대한 외부자의 시각과 내부자의 시각을 살펴보고, 이슬람의 탄생배경과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의 생애에 영향을 준 기독교, 그리고 아라비아반도를 둘러싼 기독교의 역사적, 신학적인 배경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슬람이 기독교적 배경에 의하여 형성된 종교임을 밝히고 이슬람을 연구하는 이들에게 분별의 척도를 세우고자 한다.

 

주제어: 이슬람,기독교,유대교,이단,아라비아반도,무함마드

 

 

Ⅰ.들어가는 말

 

최근 세계 통계 보고서에 의하면 전 세계 인구는 약 79억 명이 넘었다. 그 가운데 23% 즉, 약 16억 명의 무슬림이 지구상에 살고 있다. 이슬람은 6세기 아라비아반도 메카에서 태어난 예언자 무함마드(Muhammad, 570-632)에 의하여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이러한 시각으로 아라비아반도의 메카(Mecca)와 메디나(Madinah), 이 두 도시에서 일어난 사건에 초점을 맞추고,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의 삶과 그의 활동에 집중하게 된다. 그러나 무슬림들은 이슬람이 무함마드에 의하여 시작된 종교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다시말해 무슬림들은 이슬람은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가 지구상에 내려와 살기 이전부터 존재했던 종교라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이슬람 학자 야신 두톤(Yasin Dutton)은 이슬람을‘기원 이슬람’(Original Islam)과‘원시 이슬람’(Primal Islam)으로 구분하였다. ‘기원 이슬람’은 무함마드가 꾸란의 계시를 받아서 그의 동료들을 가르치고, 그다음 세대로‘계승하고 전파’된 이슬람을 말한다. 무함마드가 살던 아라비아반도 메카에서 시작된 이슬람은 무함마드를 알라(Alla)의 마지막 선지자로 받아들이고, 그에게 영원하고 완벽한 알라의 말씀인 꾸란을 계시하여 주어졌다고 믿는다. 이 ‘기원 이슬람’이 순수한 형태로 3세대에 걸쳐 전해졌으며, 그후에는 무자디스(Mujaddids, 신앙 신봉자)의 연속으로 현재까지 유지되었다. 역사적으로 이슬람은 무함마드 사망 이후 아라비아반도 밖으로 퍼져 나갔고, 이슬람의 교리를 받아들였던 아랍부족들에 의해 알려지게 되었다. 반면에 ‘원시 이슬람’은 원래 아담과 하와에게 가르쳐졌고, 선지자들의 후손들에게 전해지는 영원하고 참된 유일신(唯一神) 종교를 가리키는 것을 말한다. 선지자들에 의하여 이슬람은 여러 세대의 사람들에게 전달되었지만 사람들은 계속 타락해 갔고, 선지자들을 통하여 갱신되어 갔다. 이렇게 ‘원시 이슬람’은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본 논문에서는 내부자적인 관점을 이슬람의 신화(Myths of O-rigin)라는 용어로 사용할 것이다. ‘이슬람의 신화’라는 용어는 영국의 비교종교학자인 론 기브스(Ron Graves)가 이슬람은 원시적인 종교에 “신화가 스며들기 시작하였다”고 하였다. 논자에 이에 동의하여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의 탄생 이전을‘이슬람의 신화’로 사용하였다. 외부자적인 관점을 역사적인 이슬람(Historical Origin)으로 사용할 것이다.

기독교는 이슬람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을까? 감사하게도 20세기 초반에 에딘버러 대학교에서 중동학자였던 리차드 벨(Richard Bell, 1876-1952)의 강연을 정리한 책을 바탕으로 이 주제를 살필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강의는 이슬람이 탄생한 배경에 국한되어 있다. 이슬람의 경전인 꾸란과 관련된 연구는 동시대의 인물로서 꾸란 전문가인 윌리엄 세인트 클리어 티스달(William St. Clair Tisdall,1859-1928)이 연구한 이슬람이 형성될 당시의 이단들에 대한 연구가 좋은 자료가 된다. 최근에 출판된 론기브스(RonGraves)의 오늘의 이슬람 (Islam Today)도 좋은 참고 자료가 된다.

본 논문에서는 이슬람의 신화와 역사적인 이슬람을 소개하고 나아가 이슬람의 형성에 영향을 끼친 기독교와의 상관관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Ⅱ. 이슬람의 신화(Myths of Origin)

 

이슬람에 의하면 천사는 빛으로부터, 진(Jinn)들은 무연(無煙)의 불로부터(꾸란 7:12, 15:26-27, 55:15) 그리고 인간은 검고 묽은 흙으로부터(clayfromblackmud) 창조되었다고 본다. 알라가 인간과 진들을 창조한 목적을 “내가 영마와 인간을 창조함은 그들이 나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꾸란 51:56)라고 하여 알라를 섬기게 하려고 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진(Jinn)과 인간 둘 다 알라에게 자유의지를 선물로 받았다고도 했는데 이것은 그들 스스로 알라를 경배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었다는 것을말하는 것이다. 알라는 첫 번째 남녀(아담과 하와)를 창조했을 때 천사들에게 그들 앞에서 절을 하라고 하였다. 그런데 강력한 진(Jinn)인 이블리스(Iblis)는 새롭게 창조된 인간 앞에서 자신을 낮추라는 알라의 명령을 거절하고 순종하지 않았다. “알라께서 천사들에게 명령하여 아담에게 엎드려 절하라 하니 모두가 엎드려 절을 하나 이블리스만 거절하며 거만을 부렸으니 그는 불신자들 중에 있었노라.”(꾸란 2:34)고 꾸란에서 밝혀주고 있다. 그래서 이블리스는 징계를 받았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도 천국에서 이블리스의 꾀임에 빠져 선악(善惡)을 가리키는 나무 열매를 따먹는 실수를 범하게 되었고, 그 실수의 원인이 죄가 되었고, 그 죄에 대한 대가로 이 세상에 보내지게 된 것이다.

 

“알라께서 말씀하사 아담이 아내와 함께 천국에 거주하매 그대들이 원하는 양식을 먹되 이 나무에 접근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죄지은자 가운데 있게 되니라. 사탄이 그들을 유혹하여 그곳으로부터 나가게 하매 알라께서 말씀하사 서로가 서로의 적이 되어 얼마 동안 안주하여 살라했노라.”(꾸란 2:35-36)

 

아담과 하와는 천국에서 죄의 값으로 지구상에 오게 되었다. 이슬람에서는 아담과 하와가 이렇게 죄의 대가로 천국에서 쫓겨났으므로 원죄를 믿지 않는다. 천국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는 광야에서 방황하다 메카(Mecca) 부근에서 멈추었다가 아예 메카에서 살게 되었다. 아담은 알라를 경배할 장소를 찾아서 그곳에 카바(Ka’aba)신전을 짓고 알라를 경배하였다. 그런데 이블리스로 인하여 아랍인들은 계속해서 알라에게서 멀어지게 되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이 카바 신전이 우상숭배하는 곳이 되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는 목수였으며 우상을 만들어서 팔았다. 아브라함은 아버지가 없는 틈을 타서 우상을 모두 부숴버리고 큰 것만 남겨두었다. 이로 인하여 사람들에게 추궁을 받자 아브라함은 우두머리가 다른 우상을 부쉈다고 주장했다(꾸란21:62-63). 이에 화가 난 사람들이 아브라함을 죽이려고 하자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와 함께 도망을 갔다. 이에 대하여 마크 가브리엘(Mark Gabriel)은 다음과 같이 이슬람의 주장을 서술하고 있다.

 

사라는 아들을 낳지 못하자 아브라함에게 하갈을 통하여 아들을 낳을 것을 권유하였고, 하갈을 통하여 이스마엘을 낳았다. 그 후 사라에게서 이삭이 태어났고, 이스마엘과 이삭은 같이 자랐다. 아브라함이 두 아들을 사랑했으나 사라는 여종 하갈의 아들이 자기 아들과 똑같이 사랑을 받는 것에 불만을 가졌다. 그로 인하여 아브라함은 하갈과 이스마엘을 데리고 아라비아반도로 여행을 떠났고 메카에 이르렀다. 그 후에 이스마엘은 그의 어머니 하갈과 함께 메카에서 살기 시작하였다. 아브라함이 하갈과 이스마엘을 남겨두고 떠났고, 두 사람은 잠잠(Zamzam)으로 알려진 신성한 우물을 발견할 때까지 광야에서 방황하였다.

 

이슬람 역사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하갈과 이스마엘을 메카에 데려다 주었다. 아브라함이 두 번째로 가족을 만나러 메카에 왔을 때 유일신인 알라를 경배하기 위해서 이스마엘과 함께 신전을 지었다 그 신전이 카바 신전인데 이 신전은 인류에게 복을 내리고 인간을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하여 지어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꾸란 3:96-97). 성경에는 어디에도 아브라함이 아라비아반도를 여행했다는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 지역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아브라함은 메카를 여행할 수 없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이슬람에서는 카바 신전은 원래 아담이 지었으나 후에 무너져버렸으며, 이 무너진 신전을 아브라함이 재건했다는 것이다. 꾸란에 아브라함은 이슬람을 믿었다고 기록되어 있다(꾸란 3:67). 꾸란에는 ‘아브라함의 종교’라고 표현이 여러 차례 나타난다(꾸란 2:130, 2:135, 3:95, 4:125, 6:161). 더불어 아브라함과 그 이후의 선지자들과 사도들(이삭, 이스마엘, 야곱, 노아, 다윗, 솔로몬, 모세, 요한, 예수)이 이슬람에 대하여 설교했다. 꾸란은 알라의 뜻에 복종하는 선지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해서 보여준다. 선지자 중 일부는 계시를 위해 선택되었는데 그들 중에 모세(토라), 다윗(시편), 예수(복음서) 그리고 마지막 무함마드(꾸란)가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

메카는 유일신을 위한 순례지가 되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변질되어 다시 우상숭배의 중심지가 되었다. 잠잠(Zamzam) 우물은 남부 아라비아의 침략자인 주루훔(Jurhumite)인들이 다른 사람들이 이 우물을 소유함으로써 어떤 이득을 볼 수 없도록 돌과 보물들로 우물을 막아버렸다. 그 후 아브라함의 자손 중 강성한 꾸라이시(Quraysh)부족이 그 지역을 차지하였고, 꾸사이(Qusayy)의 명령으로 카바 신전 주변에서 집을 짓고 살면서 메카의 정착 생활이 시작되었다. 이곳에서 아브라함에 의해 이스마엘이 알라에게 제물로 바쳐진다.

 

꾸란의 계시가 내려지기 이전과 무함마드 등장 이전까지, 아브라함의 모델은 꾸란의 명칭인‘말씀의 사람들’(ahl al-kitab) 즉, 유대인 및 기독교가 이끌어왔다. 그러나 이 두 종교는 타락하였다. 따라서 인류의 행복을 위하여 마지막 계시가 필요했다. 마지막 계시는 이스마엘의 후손인 아랍인들에게 맡겨졌다. 이슬람에서는 알라의 뜻에 복종하는 최고의 모습이었던 아브라함에 의해 알라에게 제물로 바쳐졌던 인물은 이스마엘이었다. 

 

유대교와 기독교가 타락했다는 이슬람의 교리가 여기에서 등장하고 동시에 이스마엘을 통하여 아랍인들에게 마지막 계시가 주어졌다는 것이다. 꾸사이가 그의 아들 압둘 알 다르(Adb al-Dar)와 그의 후손들에게 카바 신전의 열쇠를 관리하는 자격을 주었고, 그의 첫째 아들인 하심과 그의 후손들에게는 순례자들을 위한 식량과 쉼터를 제공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하심의 아들인 무딸립(Abdulal-Muttalib)은 무함마드와 같이 우상 앞에서 기도한 적이 없고, 오직 알라만 섬겼다고 알려져 있다.

무딸립에게는 열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 압달라(AbdAllah)라는 막내아들을 가장 사랑하였다. 압달라는 현재의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무역하다가 임신한 부인 아미나(Aminah)를 남겨두고 사망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그의 아들이 태어난 날에‘ 이 백성들의 주인이 당신의 태중에 있었고, 그가 태어났을 때 나는 모든 악으로부터 그를 보호할 것이다. 그의 이름을 무함마드라고 하라’라는 목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Ⅲ. 역사적 이슬람(Historical Origins)

 

이슬람이 시작되기 전 아랍인들은 부족이나 가정에서도 우상숭배는 일반적이었다. 유대인 부족이 지배적이었던 메디나에서도 부족신들이 번성하였다. 그러나 무함마드가 이슬람의 유일신론을 전파하면서 아랍인들이 새로운 종교를 받아들였고, 이때부터 우상숭배가 쇠퇴하였다. 유일신주의는 메디나의 유대인 부족과 시리아와 그 주변에 존재하는 다양한 형태의 기독교를 통해 이 지역에 퍼져 존재하였다. 사막의 아랍인들은 종교에는 무관심하고 싸움, 음주, 도박 및 성행위에 더 관심이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다. 메카는 다양한 우상들이 상인들 생계의 일부였기 때문에 중요하게 여겨졌다. 이슬람 이전의 아라비아 사회는 무자비하고 비도덕적인 무지의 시대(자힐리야,jahiliya)였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무함마드의 출생지인 메카는 특별한 장소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곳은 기독교 비잔틴 제국과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 사산왕조(Sassannids) 두 강대국의 영향밖에서 존재하고 있었기에 경제적으로 삶이 어려웠다. 땅은 메마르고 농업은 희박한 곳이었다. 이렇게 혹독한 환경에서 570년경에 꾸라이쉬 가문에서 무함마드가 태어났다. 그리스의 천문학자인 프톨레마이오스(Claudius Ptolemae os, 83년경-168년경)가‘마코라바’(Macoraba)라고 지칭한 그곳에서 꾸라이쉬 부족이 거주했고, 카바 신전 주위에서 이슬람은 발전하였다. 메카는 꾸라이쉬 부족에게 지배를 받았고, 도시의 정치 및 경제를 통제하고 다른 아랍국들의 침입을 방어하는 것이 꾸라이쉬 부족의 임무이기도 했다.

무함마드는 꾸라이쉬 부족에서 태어났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친삼촌인 아부 탈립(Abu Talib)에 의해 자라났는데 무함마드는 성인이 되어 무역에 관여하였고 비잔틴 기독교인, 유대인, 페르시아 조로아스터 교도들과 접촉하였다. 25세의 나이에 그는 나이가 많은 과부이자 성공한 상인인 카디자(Khadija)와 결혼을 하였다. 무함마드는 그의 유일한 아내였던 카디자와 15년동안 부부의 연을 맺으며 자녀를 낳았다. 두 아들 압둘(Abdul)과 까심(Qashim)은 어려서 죽었고 딸들도 일찍 죽었다. 오직 파티마(Fatima)만이 무슬림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무함마드는 사색적인 성격을 지녔으며, 상업하는 동안 종종 도시를 떠나 사막에서 시간을 보냈다.

이 시간에 그는 존재의 본질은 물론 메카인 사회의 사회적 불의를 곰곰이 생각하였다. 그는 종교적인 성향을 가졌지만 우상들을 숭배하지는 않았다. 그는 35세 때부터 아랍의 라마단 기간 동안 메카 위쪽의 누르산(Jabal al-Nur) 정상 근처에 있는 히라의 동굴로 들어간 것이다. 무함마드가 40세였을 때 아랍어로 지브릴(Jibreel) 또는 성경에 나오는 가브리엘(Gabriel)로 밝혀지는 신의 사자가 무함마드 앞에 나타나서 ‘읽으라’(Read)고 명령하였다고 한다. 그 명령은 다음과 같다. 

 

그 명령은 세 번이나 나왔는데 무함마드는 그가 무엇을 읽어야 하는지 분명히 알지 못하였다. 마침내 인류에 대한 알라의 마지막이자 최후의 계시(꾸란96:1-5)가 무함마드에 의해 알려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무함마드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하였고 두려운 마음에 부인 카디자에게로 달려갔다. 카디자는 무함마드에게 그 메시지가 알라로부터 온 것이라는 믿음을 주었고, 그녀의 말로 인하여 무함마드 또한 확신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처음에 무함마드는 그의 영적인 만남을 큰 고뇌로 여기고 악마가 자신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서 자살할 생각으로 산꼭대기에 올라갔는데 한 영(靈)이 나타나서 자살을 막았다고 한다. 그는 아내에게 달려가서“나를 안아 주오. 오 카디자여, 도대체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이요?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아서 두렵소”라고 하였다. 카디자는 남편을 안정시켜 놓고 외사촌 와라까 빈 나우팔(Waraqua bin Naufal)을 찾아갔다. 카디자의 이야기를 들은 그는 무함마드가 히라산에서 본 영이 진이 아니고 천사 가브리엘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그는 헬라어와 히브리어도 부분적으로 알고 있었다. 카디자를 통하여 와라까의 이야기를 들은 무함마드는 아직은 확신이 없었다. 얼마 후에 와라까는 죽었고, 무함마드가 길을 걸을 때 히라의 동굴에서 나타난 그 영이 다시 나타나서 메시지를 전해 주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무함마드는 의심하지 않았다.

새롭게 ‘알라의 선지자’로 부름받은 무함마드는 도시에서 공개적으로 설교하기 전에 그의 친밀한 지인들과 가족들에게 은밀하게 이슬람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첫 번째 추종자로는 카디자, 무함마드의 사촌 알리(Ali Ibn Abu Talib)와 무함마드의 오랜 친구인 아부 바크르(Abu Bakr alsiddq)였다. 또한 이슬람의 초기 추종자들 중에는 우마르(Umar ibn al Khattab)와 우스만(Uthmān ibn Affān)도 있었다. 이 네 명의 남자들은 각각 무함마드의 죽음 이후에 이슬람 공동체의 지도자(칼리프)가 되었다.

10년 동안 무함마드는 메카에서 인간은 알라에게 예배를 드리고 자선을 베풀어 사회 정의를 지켜야 한다는 설교를 하면서 전능한 우주의 창조주인 알라에게 완전히 복종하는 충직한 신자들을 모았다. 그러나 이교도뿐 아니라 대부분의 메카 상인들은 새로운 종교에 대하여 강하게 반대하였다. 박해가 시작되자 무함마드는 견디기 힘들다고 여겨 첫 번째 무슬림들에게 에티오피아의 기독교 통치자와 함께 피난처를 찾으라고 조언하였다. 그때가 615년이었다. 그 후에도 박해가 계속되었을 때 그의 부인 카디자와 아부 탈립이 죽는 이중 타격을 입게 되었다. 가장 먼저 자신을 지지하여주던 아내의 죽음은 정신적으로 힘들었다. 그러나 그의 삼촌의 죽음은 무함마드가 사는 지역에서 더 강력한 보호자가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이제 그의 삶은 위험에 처한 것이다.

그를 죽이려는 음모가 조직화되자 그는 메카를 떠나 오아시스 도시 메디나로 가게된다. 그런데 그곳 부족간의 갈등과 메디나 지도자들이 지역사회에 끼치고 있던 긴장을 조정하고 해결하여 달라며 그를 초청하였다. 그러자 무함마드는 추종자들을 자기보다 먼저 보내고 자신은 한밤중에 간신히 빠져나왔다.

622년 메디나로의 이주는 상황을 변화시켰다. 즉, 무함마드는 메카에서의 경멸받는 종교지도자에서 알라의 계시를 받는 알라 선지자의 권위를 인정한 공동체를 세워 현세와 영적인 지도력을 동시에 가진 정치적인 인물로 탈바꿈한 것이다. 메디나와 다른 부족의 충성스러운 새로운 개종자들이 알라에 대한 믿음과 무함마드 지도력을 인정하며, 혈연관계를 뛰어넘어 동맹을 결성하는 공동체가 생겨났다. 메디나로 이주한 해를 히즈라(Hijra,이민)라고 부르는데 이때가 이슬람 역사상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기에 이슬람력의 첫 번째 해로 기록되었다.

그런데 무함마드의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의 신생 공동체가 메디나에서 성공적으로 등장하였다고 해도 메카인들은 매우 냉소적이고 적대적인 태도가 여전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메카 군대와의 무력 충돌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627년 바드르(Badr) 전투는 아라비안 부족들 사이에서 무함마드의 명성을 중요하게 바꾸어놓았다. 무슬림들과 메디나인과의 동맹은 메카연합군보다 훨씬 더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승리하여 주변 부족들에게 이슬람의 힘을 보여주고 단결을 끌어냈다고 본 것이다.

계속되는 전쟁으로 인하여 메카는 결국 무함마드에게 항복하였고, 628년 무함마드는 카바 신전 안에 들어가 모든 우상을 파괴하고 오직 알라만을 위한 신전으로 선포하였다. 무함마드는 4년 후에 마지막 계시(꾸란 5:3)를 끝으로 62세의 나이에 죽었다. 그는 마지막 고별설교에서 알라 앞에서 인간은 평등하며 모든 무슬림들은 형제라고 하였다.

 

 

Ⅳ. 이슬람의 형성 과정에서 영향을 끼친 기독교

 

성경에서 아라비아반도에 기독교가 전파되었다고 하는 정확한 정보는 많지 않다. 사도행전에 아라비아인들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고(행 2:11), 사도들이‘그들의 언어로 하나님의 위대한 일들을 선포했다’는 것을 들었다고는 한다. 그러나 그 말씀만을 가지고 무엇을 도출하기에는 너무 빈약했다. 바울이 개종한 뒤에 아라비아에 있었던 시간들도 불분명하다. 그가 언급한 3년(행 9:23-25)은 아라비아에 있었던 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개종과 예루살렘 올랐던 일 그리고 다메섹에서 활동한 시간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르낙(AdolfvonHarnack)은 사도행전의 본문이 거기에서 그가 선교적인 활동을 했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생각하지만 바울이 회심한 뒤에 얼마 동안 조용하고 고립된 장소에서 경험한 것이 무슨 뜻인지를 명백하게 확인하고, 그가 유대인으로서 바리새파를 떠나 미래를 결단하기 위해 준비했던 시간으로 보는 것이 맞다는 것이다. 그의 아라비아 방문은 선교 활동의 증거가 아니라 기독교 진리의 독립성을 분명하게 하는데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갈 1:17)고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다.

바울이 갔던 아라비아는 아라비아반도의 중북부인 사우디아라비아혹은동부인예멘과 오만등을 간 것이 아니라 반도 북부에 있던 요르단 남부 지방을 방문하였던 것으로 성경학자들은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역사가 증명하듯이 시간이 지나면서 아라비아반도의 많은 종족들이 기독교를 접할 수 있었다. 무함마드 당시 메카는 예멘과 시리아, 이라크, 에디오피아를 잇는 관문 도시였다. 이슬람이 시작되었던 메카에 대한 기독교의 영향력은 세 곳에서 형성되었다. 북서부의 시리아, 북동부의 메소포타미아 그리고 아비시니아의 영향력이 예멘에 미쳤기에 그곳이 기독교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는 것이다.

 

1. 시리아의 기독교(Christianity of Syria)

시리아는 초기 기독교의 중심지였다. 예루살렘, 다메섹 그리고 안디옥에 교회가 설립된 후에 교회는 아라비아 사막 주변까지 퍼져 나갔다. 3세기 말에 시리아 남부 보스라(Bosra)가 주교의 관할권에 있었으며, 그후 4-6세기 동안 기독교는 보편화되어 있었다.

452년 칼케돈 공의회(Council of Chalcedon)에서 시리아의 단성론자들은 이단으로 정죄를 받았다. 단성론자는 그리스도께서 탄생, 삶 그리고 죽음이라는 순환을 가지고 지상에서 인간의 몸을 띄고 있지만 예수의 본성은 전적으로 신성(神性)이라는 것을 믿는 사람들이다. 단성론자의 교리는 452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주장되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는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의 두 가지 본성이 아니라 오직 한가지의 신적인 본성만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4, 5, 6세기 동안에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한 교리의 발전에서 여러 가지의 다양한 전승들이 생겨났다. 칼케돈 공의회는 그리스도가 “섞이거나 변화되거나 나누어지거나 분리되지 않는 두 본성으로 인지되어야 한다.”고 선언한 교리를 받아들였다. 이는 한편으로는 그리스도 안에 두 본성이 나뉘어 존재하므로 실상 그리스도는 두 인격이라고 주장한 네스토리우스 교리를 반대한 것이고, 다양한 단성론자들을 반대한 것이다. 이로 인하여 시리아 교회는 분열되었다. 시리아 교회의 마지막 분열은 안디옥의 총 대주교였던 세베루스(Severus of Antioch, 459-538)가 소집한 두로 공의회(Synod of Tyre)였는데 이 공의회를 끝으로 시리아 기독교는 분열되었다. 칼케돈 신조를 따르는 시리아 교회(the Chalcedonian Orthodox), 시리아 동방 정교회(the Oriental Orthodox) 그리고 시리아 동방 교회(the Church of the East)였다.

시리아 교회가 분열됨에 따라서 비잔틴 제국의 동부가 약해지고 페르시아로부터 오는 위협을 방어하는 차원에서 542년 유스티아누스 황제(JustianusⅠ, 482-565)는 독립적인 단성론자인 야곱 바라데우스(Jacob Baradaeus, 543-578)와 아라비아의 테오도르(Theodore of Arabia)를 아라비아 국경선 부근의 주교로 임명하였다. 이들은 훗날 야곱 바라데우스의 이름을 따서 야곱파로 불리우게 된다.

하리스 이븐 자발라(al-Harith ibn Jabalah, 재위 529-569)는 갓산 왕조(Ghassanids)의 왕으로서 528년부터 569년까지 약 40년 동안 통치하였다. 갓산 왕조의 아랍인들은 대부분 단성론자들이었다. 이들의 제안이 있었기에 유스타이누스는 단성론자 주교를 세울 수 있었다. 하리스의 아들인 문디르 이븐 하리스(al-Mundhir ibnal-Harith, 재위 569-581)는 왕위와 함께 단성론을 계승하였다. 갓산 왕조는 자비아(Jabiyah)에 수도를 두고 북으로는 레바논과 남으로는 시내 반도까지 영향이 있었다. 이들의 강력한 권력은 아랍인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종종 메디나까지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암시가 있다.

시리아의 아라비아는 초기에 이단의 소굴이라는 명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 지역은 헬라 문명과 셈족의 사상이 접촉하는 지점으로서 유대적 기독교(JewishChristianity)를 중심으로 하는 종파들이 2세기부터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엘카사이파(Elcesaites)는 1세기 말 요단강 근처에서 발생해서 페르시아까지 퍼진 유대 기독교 종파였다. 에비온파(Ebionites)는 구약성경에서 ‘가난한 자’(evionism)라는 뜻에서 비롯되었으며, 본래는 예루살렘 신자들에 대한 경칭으로 사용되었다. 에비온파는 모세 율법의 유효성을 신봉하면서 유대인의 율법과 전통 위에 기독교를 이식시키는 주장을 펼쳤다. 그 외에 여러 이단들이 생겨났다.

시간이 지나면서 비잔틴 기독교 제국에서 이단들에 대한 박해가 심했다. 따라서 이단들은 비잔틴 제국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는 아라비아반도 내륙으로 피난을 갔다.

 

2. 메소포타미아의 기독교(Christianity of Mesopotamia)

아라비아 북동부의 기독교 지역은 일부는 비잔틴 제국 안에 있었지만 대부분 페르시아 제국 안에 있었다. 3세기 말에 에데사(Edessa) 지역에서 기독교는 활발하게 성장하였다. 그리고 기독교가 이미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유역에 퍼져나갔다. 페르시아 왕국의 수도에도 교회들이 있었다. 그곳에 자리 잡은 네스토리안파는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나갔다. 그 동기는 알렉산드리아의 총주교 키릴루스(CyrilofAlexandria,376-444)와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 네스토리우스(Nestorius, 386-451)의 논쟁 때문이었다.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위격(位格)이 두 개의 성격으로 구별된다고 보았다(이성설, 二性說). ‘성모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지만 하나님의 어머니는 아니다’따라서 인성으로서 예수를 낳은 성모 마리아에게 하나님의 어머니인 테오토코스(Theotoskos)라는 호칭을 사용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고, 이로 인하여 교회가 분열될 조짐을 보이자 비잔틴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Flavius Theo dosius, 401-450)에 의하여 431년에 에베소 공의회(Council of Ephesus)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네스토리우스는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네스토리우스는 아라비아의 페트라로 추방되어 451년 수도원에서 죽었다.

네스토리우스를 따르는 추종자들은 바르 소마(Bar Sowma)의 지도 아래 페르시아로 이주하여 새로운 터전을 마련하였고, 498년 셀레우치아-크테시폰(Seleucia-Ctesiphon) 공의회를 통해 네스토리우스의 입장에 대한 공식적인 지지를 천명하고 네스토리우스파로 알려진 독자적인 교회를  건설하였다. 그들은 활발한 선교활동과 신학교육을 벌였으며, 중앙아시아를 거쳐서 중국에까지 전해져 경교(景敎)라는 이름으로 성행하였다. 페르시아의 네스토리안들은 수많은 순교와 박해에도 6세기 말에는 교회와 주교가 없던 도시가 없을 정도였다. 페르시아의 영토였던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상당수가 아랍인이었고, 그 가운데 네스토리안들은 아라비아반도로 들어가는 길을 찾았다. 페르시아의 왕 야즈데게르트2세(YazdgardII, 439-457) 때인 447년에 순교했던 조르아스터교에서 개종한 네스토리안 사제 페티온(pethion)이 페르시아만의 아랍 쪽에 있는 메이산(Maysan)에서 선교 활동을 하였다.

아랍인에 대한 기독교의 영향에 대한 증거는 페르시아 제국의 속국이며 아랍인들로 구성된 라흐미드(Lakhmids) 왕국의 수도인 알 히라(al-Hirah)의 교회이다. 알 히라의 기독교인들은 종들 혹은 예배자라는 뜻으로 이바드(Ibad)라고 불렸다. 이미 410년에 알 히라의 주교가 메소포타미야 교회의 종교회의에 참석했다는 기록이있다. 라흐미드 왕국은 아랍인들로서 예멘에서 아라비아반도를 가로질러서 이주하였고, 3세기 후반부터 7세기까지 북부 아라비아반도를 다스리고 있었다. 라흐미드 왕국은 경쟁자였던 갓산 왕국과는 다르게 기독교를 국교로 채택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문디르 3세(al-Mundhir Ⅲ, 503-554)는 기독교인이었으며, 그의 부인 힌디 빈트 누만(Hind bint Numan)은 갓산 왕의 딸로서 독실한 네스토리안 기독교인으로서 알 히라에 수도원을 세웠다. 그의 아들 아미르(AmribnHind)는 라흐미트 왕국을 554년부터 569년까지 통치하였는데 그는 공개적인 기독교인이었다. 라흐미드 왕국의 수도인 히라를 중심으로 한 네스토리안 기독교인들의 특징들이 아랍 부족들 내부로 전달되었을 것이다. 이슬람 역사에 의하면 예언자 무함마드가 12살 때 시리아의 남부보스라(Bosra)를 방문하였을 때 네스토리안 수도사 부하리(Buhari)를 만났다. 그 수도사는 처음으로 무함마드가 선지자임을 무함마드의 삼촌에게 알렸다. 그 후에 25세 때 카디자의 총무로 대상을 인도하던 무함마드는 다시 네스토리안 수도사를 만나기 위하여 보스라를 방문하였다. 이렇듯 무함마드와 네스토리안 수도사와 접촉이 있었다.

 

3. 아비시니아의 기독교(Christianity of Abyssinia)

홍해로 인하여 아라비아반도와 분리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비시니아 영토는 이슬람의 요람인 메카 부근까지 영향이 있었기에 살펴볼 필요가 있다. 홍해 서부 해안가의 셈족은 해상무역을 비롯한 교류로 인하여 아라비아반도를 통해서 아프리카와 연결되어 있다. 무함마드에 의하여 메카에서 역사상 최초로 이슬람의 기도 시간을 알리는 무에진(Muaddin)으로 알려진 빌랄(Billa ibnRabah, 580-640)은 메카에서 태어난 아프리카에서 건너온 흑인 노예 출신이었다. 그런데 아비시니아가 무함마드와 긴밀한 관계가 있었다는 가장 중요한 증거는 메카에서 이슬람이 시작되었을 때 쿠라이시 부족으로 박해를 받았던 무슬림들을 무함마드는 그의 딸 루카야(Ruqayya)와 그녀의 남편 우스만(Uthman)을 포함한 무리들을 아비시니아로 대피시킨 사건이라는 것이다. 아비시니아의 초기 왕조는 기원전 1세기부터 존재했던 악숨(Axum) 왕국이다. 악숨 왕국은 1세기경부터 에디오피아 고원 외에도 동부 소말리아와 홍해 넘어 아라비아반도와 예멘지역까지 그 세력이 확대되었다. 그 세력이 악숨 왕이었던 네구스(Negus)는 그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해 주었고, 그들은 628년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아비시니아는 4세기부터 단성론파 기독교가 국교가 되었다. 이들은 메디나와 연결되어 있었다.

2세기부터 6세기까지 아라비아반도의 예멘 남부지역은 힘야르(Himyarite) 왕국이었다. 힘야르 왕국은 4세기부터 유대교를 받아들였다. 예멘 북부에는 기독교인들이 살고 있던 도시 나즈란(Najran)이 있었다.

523년 힘야리트 왕국의 유대교 개종자로 알려진 두누와르(DhuNuwas)는 나즈란을 점령하여 교회를 불태우고 많은 기독교인들을 죽였다. 나즈란 기독교인들은 비잔틴 황제 저스틴 1세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저스틴 1세는 아비시니아에 보복을 요청하였고, 아비시니아는 525년에 힘야르 왕국을 점령하였으며, 두누와르는 죽음을 당하였다. 아비시니아가 남부 아라비아반도를 통치하였다. 아비시니아가 힘야르 왕국을 점령할 때 사령관이었던 아브라하(Abraha)는 630년에 예멘의 총독이 되었다. 그는 40년 동안 권력을 잡았고, 그의 메카에 대한 정복이 꾸란에 언급되어 유명해졌다. 아브라하는 거대한 교회를 수도인 사나(San’a)에 세웠다. 그리고 메카의 이교도의 신전인 카바 신전이 아니라 이곳을 순례의 중심지로 삼고자 하였다. 아브라하는 군대를 이끌고 카바 신전을 파괴하러 메카로 원정을 떠났다. 아랍인들의 상상력을 놀랍게 한 것은 아브라하 군대의 코끼리의 존재였다. 그러나 메카의 국경에서 아브라하 군대는 기적적으로 몰락했다. 코끼리가 움직이기를 거부했고, 새 떼들이 군대에게 돌을 던졌기 때문이다. 이 서사를 해부한다면 기독교 지도자로서 아브라하가 자기의 영향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메카를 자신의 영토 안에 있는 사나로 대체하려고 했으며, 그 과정에서 참사가 일어났다. 이때가 570년이었고 전통에 의하면 이슬람의 예언자무함마드는코끼리해에태어났다고알려져있다. 아브라하는 그 참사에서는 살아남았지만 오래지 않아서 죽었고, 현지인들은 페르시아 제국에 지원을 요청하였고, 아라비아 남서부의 기독교의 지배력도 약해졌다. 그러나 나즈란 기독교는 자신의 세력을 유지하였고, 나즈란에서 기독교인 대표단이 631년 무함마드 말년에 협상을 하러 450마일 떨어진 메디나에 왔다.

 

 

Ⅴ. 나가는 말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이슬람의 신화와 역사적 이슬람이 시작된 아라비아반도는 기독교의 영향에 둘러싸여 있었다. 이슬람이 시작되기 이전인 6세기에 카바 신전의 이교도 사당에 걸려있었던 유명한 시를 지은 아랍의 시인 임루 알 카이스(Imru’ul-Qais, 501-544)가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이슬람 초기 무함마드 군대의 타킷이 되었던 물건을 실은 카라반들은 메카에서 다마스커스를 왕래하였다. 무함마드의 증조 할아버지의 형제인 나우팔(Naufal)과 누탈랍(Nuttalab)은 그들이 쿠라이시 부족장으로 있을 때 페르시아 사람들과 조약을 맺고 페르시아의 영향 아래에 있던 이라크와 고대 페르시아 지역인 파르스(Fars)와 무역을 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 606년에 아부 수피안(Abu Sufyan)을 리더로 하는 쿠라이시 부족이 페르시아의 수도에서 페르시아의 왕을 만나기도 하였다.

또한 무함마드의 부인 카디자(Kadija)는 유대-기독교 이단인 에비온파(Ebionites) 신자였다. 카디자의 사촌이며 무함마드의 멘토였던 이븐 와라까 나우팔은 에비온파의 사제로서무함마드와 카디자의 결혼식에 관여하였다.

이슬람의 신화와 역사 속에서 나타나는 성경과의 유사성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당시 비잔틴 기독교인들은 이슬람을 새로운 종교라고 여기지 않았다. 이슬람을 많이 연구했던 다마스커스 요한네스(John of Damascus, 660-749)는 724년 유다 땅의 광야의 마르사바(Mar Saba)의 수도원에서 많은 신학적 저서들을 남겼다. 그의 저서 가운데 이슬람을 다루는 내용은 『지식의 근원』 (Fount of Knowledge)의“제2부 -이단에 관하여”에서 100개의 기독교 이단을 언급했는 데 이슬람을 가장 최근에 생겨난 이단 즉, 101번째 이단으로 간주하였다. 그는 이슬람을 ‘이스마엘파 이단’으로 분류하였다. 종교개혁자 존 칼빈(John Calvin, 1509-1564)도 이슬람을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일신론적 이단으로 이해했다. 우리는 7세기 아라비아반도를 중심으로 전통기독교와는 다른 중간 형태의 기독교가 많이 있었으며 수많은 이단들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즉, 당시의 종교적, 정치적 환경 가운데 살아가는 이들은 이슬람교를 새로운 종교가 아니라 기독교의 한 분파 혹은 이단으로 인식하였으며, 이러한 인식에서는 이슬람 종교의 형성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종교는 기독교였으며, 이를 차용한 결과물이라고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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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Christianity’s Influence on the Islamic Mythology and History

 

Yoo, Hae-Seok

(ChongShin Theological University. Missiology)

 

How to understand Islam is one of the big challenges that today’s church is facing, but this can be learned through implications from the Christian tradition. In 1930, the total Muslim population in the world was 203 million but reached 1.6 billion in 2020 by increasing 2.32% each year. The number rose approximately 4-5 million on average every year when it was about 204 million. However, the increasing number per year has turned to 37 million now when the Muslim people are 16 billion in the world. This increasing trend in the Muslim population has no difference in Korea. The exact number of Muslim people in Korea are unknown, but 73% of the Muslim convert in Korea are from 450 

Christianity according to a study by Sungsu Park. Therefore, this is a call for Korean Church to suggest an alternative solution for Islam. To do this, an understanding of the Islamic religion is urgent. In Korea, Islam is seen as a type of religion other than Christianity while it was considered a heresy of Christianity in the Byzantine Empire that lived a long history along with Islam. Also, religious reformers including Martin Luther, John Calvin, and Heinrich Bullinger regarded Islam as a heresy. 

Along with this topic, this study is going to examine both aspects from Muslims and non-Muslims first on Islam first, then the historical background of Islam and Christianity that influenced the life of Muhammad, the Muslim prophet, and the historical and mythical background of Christianity in the Arabian Peninsular. Furthermore, this study aims to clarify that Islam religion was formed in the Judaism-Christianity background and to establish a way of discernment for people studying Islam. 

Key-words: Islam, Christianity, Judaism, Heresy, the Arabian Peninsular, Muhamm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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