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는 지금
개혁주의 관점으로 보면 이슬람 선교의 대안을 찾을 수 있다
총신대학교 유해석 교수
글 정소영 기자 · 사진 김희석 객원 기자
전 세계 인구 약 77억 중 무슬림은 23%로 약 17억 5천 만 명으로 추정한다. 세계 인구 5명 중 1명 꼴이다. 한국도 약 30만 명의 무슬림을 추산하는데 그 수는 앞으로 더 늘어날 것으로 전망한다. 유럽은 이슬람화되고 있으며, 기독교 국가는 사라지고 있다. 유럽의 많은 정치 지도자는 다문화 정책의 실패를 공언했다. 지난 2000년 영국 성공회의 켄터베리 대주교는 “영국은 더 이상 기독교 국가가 아니다”라고 선포했다. 모스크에서 기도하는 무슬림이 영국 국교회에서 예배하는 기독교인보다 많아졌기 때문이다. 이처럼 다른 문화와의 충돌은 불가피하다. 유해석 교수는 “유럽의 현재가 한국의 미래”라며, “다문화 사회로의 진입을 앞둔 현재, 국가의 분명한 다문화 정책 수립과 이슬람 유입에 대한 한국 교회의 바른 자세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유해석 교수는 저술과 강의 등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는 이슬람 전문가로 1996년 무슬림 전문 선교회인 FIM국제선교회를 설립해 대표로 섬기고 있으며, 총신대학교 선교대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지난 4월 1일 유 교수를 만나 한국에서 성장하는 이슬람의 원인과 이슬람을 대하는 한국 교회의 올바른 대안 및 선교 방향성에 대해 들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종교 이슬람의 세계 현황과 성장 원인은 무엇인가?
1930년 전 세계 이슬람 인구는 2억 3천만 명에서 현재 17억 5천만 명까지 성장했다. 이슬람 성장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다산’이다. 코란은 알라가 창조하신 질서를 무너뜨리는 사탄을 선택하는 자들은 큰 손해를 보게 될 것(4:119)이라고 기록한다. 따라서 무슬림은 낙태나 피임은 알라의 창조 질서를 무너뜨리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무함마드는 “자녀를 많이 낳아 이슬람을 번성케 하라”고 했다. 이는 이슬람 국가의 생물학적 인구 증가를 가져왔다.
둘째, ‘오일 달러’다. 대부분 이슬람 국가는 산유국이다. 이슬람에는 두 종류의 헌금이 존재한다. 하나는 자카트로 수입의 2.5%를 가난한 이들에게 기부한다. 그리고 싸다까라는 신앙 공동체를 위해 활용하는 헌금이 있다. 코란에 싸다까의 용도에 대해 8가지를 언급하는데 그중 ‘알라를 전파하는 데 사용할 것’을 말한다. 아랍 산유국은 모스크 건설에 앞장서며 많은 재정을 선교비로 지출하고 있다. 예를 들어, 2015년 시리아 난민이 유럽으로 갈 때, 사우디아라비아는 난민을 받지 않는 대신 독일에 200개의 이슬람 사원을 지어 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 내 이슬람의 움직임은 어떠한가?
4차 산업혁명으로 통신과 교통이 발달하며 자본을 찾아 움직이는 신유목민 시대가 도래했다. 1990년대 한국은 직업 3D현상으로 인력난을 겪었다. 2만명의 외국인산업연수생이 그 자리를 메꾸면서 이주민 증가와 함께 이슬람 인구도 늘어났다. 여기에 또 하나의 움직임은 난민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난민들이 들어오고, 작년에는 아프간 난민이 입국했다. 한국은 세계2차대전 이후 140개의 신생 독립국 가운데 유일하게 OECD에 가입한 나라다. 많은 외국인이 코리안드림을 꿈꾸며 찾아온다. 여기에는 유학생도 있다.
무슬림들은 성서의 백성과 결혼하라(5:6)는 말씀에 근거해 기독교인과 결혼한다. 그렇게 낳은 아이를 ‘코슬림’이라 부른다. 이슬람 국가는 주민등록증 에 종교란을 표기하는데 법에 의해 아버지의 종교를 따른다. 이슬람협력기구(OIC)는 한국 이슬람 인구를 약 20만 명으로 추산하며, 정부는 불법 체류자 40만 명 가운데 약 21%를 무슬림으로 통계한다. 약 30만 명 정도의 무슬림이 한국에 거주한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인이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한국 전쟁 이후 터키를 통해 무슬림들이 들어왔고, 이들은 고아원과 학교를 세우는 등의 사역을 펼쳤다. 1995년 205명의 개종자는 2005년 한국인 무슬림 3만 5천 명으로 증가했다. 이슬람 중앙 통계에 의하면 2009년 7만 1천 명으로 성장했다. 미국 퓨리서치센터의 2017년 2-5월까지 종교간 개종자 보고서에 따르면 이슬람으로 개종한 이의 73%가 기독교인이다. 한국도 최근 나온 논문을 종합해 보면 그 수치는 비슷하다. 그렇다면 개종의 원인이 무엇일까?
첫째, 기독교 신학의 복잡성과 모호성이다. 기독교는 2천 년 동안 내려온 좋은 신앙의 전통이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대·소요리문답, 종합편,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우리는 이를 통해 신앙을 배우고, 세례를 받았다. 그런데 교회가 이를 가르치지 않는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전도인데 예배당에 들어온 것으로 끝이다. 정작 성도들은 무엇을 믿는지 잘 모른다. 문화적으로 기독교인일 뿐이다.
둘째, 기독교 지도자들의 타락이다. 우리는 삶과 종교가 분리된 채 살아가는 기독교인을 돌아봐야 한다. 역사 속 이슬람은 기독교가 타락한 자리에서 성장했다. 과거 중동은 비잔틴 기독교 제국이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 이슬람이 들어섰다. 오늘날 유럽도 마찬가지다. 기독교가 꽃피웠던 유럽이 이슬람화의 길로 들어섰다. 우리는 이를 잊어버려선 안 된다.
이슬람의 바른 이해와 기독교인이 무슬림을 알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말씀을 부탁한다.
우리가 이슬람을 바라보는 세 가지 시각이 존재한다. 첫째, 이슬람을 반대하고 막아야 한다는 입장의 이슬람 포비아다. 역사적으로 모든 기독교 국가가 이슬람으로 바뀌었다. 비잔틴 제국, 유럽 등 역사를 보면 기독교는 위기 의식을 느끼고 막아야 하는 건 분명하다. 하지만 이는 하나님의 피조물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를 놓치게 만든다.
둘째, 내부자 운동이다. 상황화 전략으로 무슬림은 우리의 형제라는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다. 코란의 약 6천 구절 중 800구절이 성경과 동일하다. 코란에는 아브라함과 예수님이 무슬림으로 등장한다. 그들을 우리의 형제로 보고 공통적인 것을 논한다면 얼마든지 친구로 대화할 수 있다. 하지만 다원주의 관점에서 다 받아들이면 혼합주의로 갈 수 있다. 이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라는 기독교의 절대 진리를 상실하게 한다.
셋째, 종교개혁 관점이다. 역사상 이슬람 문제를 해결한 두 공동체가 있다. 스페인과 종교개혁 시대다. 스페인은 750년 동안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지만 레콩키스타를 통해 가톨릭 국가의 영토를 회복했다. 또 하나는 종교개혁이다. 당시 오스만 터키의 유럽 침공이 있었다.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해 소피아성당을 이슬람 사원으로 만들었다. 이후 바티칸을 이슬람 사원으로 만들기 위해 로마 제국 수도 비엔나를 점령하고자 했다. 그때 마르틴 루터가 있었다. 루터의 95개조항과 해설서를 보면 ‘우리가 타락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슬람을 통해 징계하시는 것’이라는 기록이 있다. 종교개혁자들은 우리가 개혁하고 변해야 함을 언급하며, 결국 이슬람 문제를 해결했다. 이슬람 군대는 비엔나를 정복하지 못한 채 물러갔다.
‘개혁주의 입장에서의 이슬람 연구의 필요’를 언급했다. 그 내용은 무엇인가?
종교개혁자들이 이슬람을 연구하며 도출된 네 가지 이해는 현재 우리가 이슬람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그 방향을 제시해 준다. 이슬람 포비아에서 선교의 대상으로 인식하기 위한 전환은 개혁주의 입장에서 연구를 통해 도울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이슬람의 성장은 하나님의 징계다. 이스라엘 백성이 타락했을 때 하나님은 앗수르, 바벨론 등을 통해 징계하셨고, 이에 이스라엘은 점령당했다. 종교개혁자들은 이 시각으로 이슬람을 바라봤다. 여기서 우리는 해결점을 찾을 수 있다. 종교개혁자들이 이슬람의 침략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돌아보고 개혁한 것처럼 지금의 한국 교회도 이슬람을 통해 반추해야 한다.
둘째, 이슬람은 기독교의 이단이다. 타종교가 아니다. 코란에는 모세 136번, 아브라함 69번, 노아 40번, 예수님이 97번 등장한다. 코란에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말이 17번 언급된다. 칼뱅은 “예수께서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을 부정하는 자마다 적그리스도니”(요일 4:2-3)라는 말씀을 토대로 무함마드는 배교자요, 이슬람은 이단으로 정의 내렸다. 기독교가 신천지 이단에 대해 공부하고 대안을 세우듯, 이슬람도 경계하며 공부해야 한다.
셋째, 십자군 전쟁을 반대했다. 이슬람에서 지하드를 선포하고 칼을 들며 정복 전쟁을 하는 것이 코란에 기록돼 있다. 또한 무함마드는 칼을 들어 전쟁에 나가 직접 싸우는 모델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인 베드로가 검으로 말고의 귀를 잘랐을 때,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마 26:52)라고 말씀하셨다. 오스만 터키가 유럽으로 몰려오자 교황청은 십자군을 일으켜 막으려고 했지만 종교개혁자들은 단호히 반대했다. 루터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수행되는 십자군 전쟁에 반대했고, 츠빙글리는 이슬람의 유럽 침공을 하나님의 징계로 보고, 전쟁 대신 무슬림에 대한 선교적 가능성을 고려했다.
넷째, 무슬림을 사랑하고 섬겨라. 종교개혁자들은 무슬림을 부정하고 적대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그들에게 다가가 복음을 전할 것을 이야기했다. 하나님의 피조물로 바라보며 복음을 통해 하나님 앞에 올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런 시각이 현재 기독교에 필요하다.
유럽의 많은 정치인들은 다문화 정책의 실패를 선언했다. 한국은 다문화 사회 속 ‘포용 정책’ 시행의 움직임이 있다. 유럽의 다문화 정책 실패 배경과 이를 닮아가는 한국 사회 속에서 교회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
유럽의 정치 지도자들은 다문화는 실패했다고 공언했다. 프랑스의 사르코지 대통령은 2011년 2월 10일 “‘프랑스식 이슬람’이 아닌 ‘프랑스 안에서의 이슬람’은 반대한다”라고 선포했다. 영국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2011년 2월 5일 독일 뮌헨의 국제안보회의 연설에서 “실패한 정책(다문화주의)을 접을 시간이 됐다”고 선언했다.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의 다문화 실패 선언 후 영국 〈데일리 익스프레스〉의 칼럼니스트 레오 미킨스트리는 유럽에서의 다문화 실패 원인을 4가지로 꼽았다. 이슬람 테러리즘, 무슬림에 의한 성폭력, 폭력적인 범죄, 마약이다.
영국은 47년 만에 유럽 연합을 떠났다. 여러 가지 이유 중 결정적으로 기름을 끼얹은 것은 이슬람 문제였다. 브렉시트 투표 전 BBC방송 공개 토론회에서 런던 시장 존슨은 ‘터키인들이 온다’고 언급했다. 16세기 이후 유럽 점령을 위해 오스만 터키가 몰려온 그때 터키인(Turks)이라는 말은 이슬람을 뜻하는 동의어로 쓰였다. 터키는 유럽 연합의 준회원국인데, 만약 회원국이 되면 영국으로 몰려올 것이라 전망했다. 이슬람에 대한 불안감이 브렉시트를 낳은 것이다.
5년 전 한국 정부는 포용 국가를 이야기했다. 유럽을 모델로 한다는 것이다. 한국은 서구화 담론으로 지금까지 발전해 선진국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그 이면에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있다. 비잔틴 제국이 그랬듯 유럽도 이슬람화 됐다. 오늘의 유럽은 내일의 한국이다. 이를 목회자들이 알고 이슬람이 무엇인지 배우며, 역사적 도전 앞에 한국 교회가 바로 서 대안을 제시할 때 본질로 돌아갈 수 있다.
이슬람 선교에 사명을 갖고 사역하는 모든 목회자에게 조언 한마디 한다면.
무슬림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전 세계 무슬림의 80%는 복음을 들어본 적이 없다. 세계 미전도 지역의 3분의 2가 이슬람 국가다. 이슬람을 제외하고 세계 선교를 논하기 어렵다. 그들이 주님 앞에 돌아올 수 있도록 그들을 위해 먼저 기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여러 전도법이 있지만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우정 전도다. 이슬람에는 친구와 손님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는 문화가 있다. 복음을 전하기 전 진정한 친구가 되는 것이 먼저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며 그들에게 다가가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에는 많은 무슬림이 있다. 선교의 패러다임이 변화해 예전에는 외국으로 보내는 선교를 생각했지만 이제는 쌍방의 선교 시대다. 이미 한국에 있는 이주민들을 선교의 대상으로 보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개혁주의 입장에서 보면 이슬람은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도구에 불과하다. 마르틴 루터는 이슬람에 대항해 싸우기 전에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더 개선하자고 말했다. 이것이 종교개혁이었다. 한국에서도 이슬람 인구가 성장하고 있다. 이슬람을 막을 방법을 찾기에 앞서 우리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복음으로 돌아가 기독교 신앙을 회복해야 한다. 우리 안에서 기독교 신앙이 회복될 때 이슬람 선교의 대안도 제시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