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기독교 신학자들의 이슬람 이해: 레이몬드 룰과 쿠사의 니콜라스 중심으로
| 유해석 교수 | 총신대학교 | 선교학 |
국문초록
이 논문은 중세 기독교 신학자들이 이슬람을 이해하고 대응한 방식을 분석하여, 이들의 관점이 현대 기독교가 이슬람과 대화할 수 있는 신학 적 방향에 줄 수 있는 시사점을 모색하고자 한다. 중세 기독교 세계는 이 슬람의 급속한 확장과 아랍의 군사적 정복에 직면하면서 이슬람을 다양 한 시각으로 해석하고자 했으며, 이를 통해 이슬람을 신학적으로 다루는 독특한 관점들이 형성되었다. 레이몬드 룰(Raymond Lull), 쿠사의 니콜라스 (Nicholas of Cusa)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슬람을 평가하고 대응 방안을 제시 했다. 레이몬드 룰은 기독교 진리를 논증하기 위해 이슬람과 철학적 논쟁 을 벌였고, 쿠사의 니콜라스는 평화적인 대화와 상호이해의 틀을 모색하 는 동시에 꾸란의 허구와 모순을 신학적 관점에서 논리적으로 비판했다. 이들 신학자의 신학적 주장과 이슬람에 대한 태도는 당대 기독교가 이슬 람을 바라본 방식과 대응 논리를 반영하며 시대적 상황에 따른 다양한 접근 방식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 논문은 13세기-15세기 중세 신학자들의 이슬람 이해를 통해 현대 기독교가 이슬람과의 관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접근할 수 있을지에 대한 교훈을 도출하고자 한다.
[ 주제어 ]
레이몬드 룰, 쿠사의 니콜라스, 기독교 변증, 이슬람, 꾸란, 이단, 중세 기독교 중세 기독교 신학자들의 이슬람 이해: 레이몬드 룰과 쿠사의 니콜라스 중심으로 _ 유해석
I. 들어가는 말
13세기-15세기의 기독교 세계는 복합적인 내부적 균열과 외부적 위협이라는 강력한 문제들에 직면했다. 1054년 일어난 동방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교회 간의 ‘대분열’(Great Schism)은 화해의 시도들에도 불구하고 신학적 차이와 정치적 갈등으로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채 지속되었다. 서방 교회에서는 1309년부터 1377년까지 이어진 아비뇽 유수(Avignon Papacy)로 교황의 권위가 크게 실추되며 교황권의 쇠퇴를 가속화했다. 서방 대분열 (Western Schism, 1378-1417) 기간 동안에는 최대 세 명의 교황이 동시에 자신의 정통성을 주장하며 기독교 세계의 분열을 심화시키기도 했다. 또한 흑사병(1347-1351)의 창궐로 유럽 인구의 약 30-60%가 사망하면서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의문과 교회에 대한 비판이 일어났다.
외부적으로 이슬람 세력은 1260년 몽골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하며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을 장악하며 기독교 세계를 위협했다. 무함마드 사후 이슬람은 메소포타미아를 비롯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 북아프리카와 스페인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으로 뻗어나갔다. 그들의 세력은 징기스칸의 서진을 위기를 맞는 것처럼 보였지만 오스만(Osman, 1258- 1326)에 의해 재정비되며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세워 기독교 국가 지역인 유럽을 침공했다. 오스만 제국은 그 이전 왕조들에서 정치는 술탄이, 종교는 칼리프가 나누어 맡아 통치하던 체제와 달리 술탄칼리프가 등장하며, 오스만의 정복사업은 종교적 사명과 연결되었다. 발칸반도의 정복이 시작되었고 1453년에는 오스만 투르크의 메흐메트 2세(Mehmed II, 1432-1481)가 동로마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켰다. 이로써 비잔틴 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레이몬드 룰과 쿠사의 니콜라스는 오스만 투르크의 전성기에 활동한 기독교 신학자들로서 그들이 직면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이슬람 신학의 모순과 허점을 학문적으로 비판하고, 기독교 신앙을 방어하고자 했다. 이슬람은 8세기부터 13세기 아바스 왕조(The Abbasid Caliphate or Abbasid Empire) 하에서 중세 이슬람 문명의 황금기를 구축했다. 아바스 문명은 금속 공예, 수학, 천문학, 의학 등 다양한 학문과 기술의 발전을 이끌었고, 고대 그리스, 인도, 페르시아의 지식을 번역하고 보존했다. 아바스 왕조의 학자들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저작을 아랍어로 번역했고 그중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중세 이슬람 철학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또한 성경과 기독교 저작들도 아랍어로 번역되었다. 따라서 이슬람에 대한 중세 기독교 신학자들의 변증은 학문적이고 철학적인 논리체계를 갖추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동시에 정치적 위협 속에서 종교적 관용과 비관용적 관점들, 나아가 호전적이기까지 한 주장들이 제기되며 이전 시대의 기독교 신학자들의 입장과 다른 차이를 보이기도 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레이몬드 룰과 쿠사의 니콜라스는 자신의 시대 속에서 각각의 방식으로 이슬람을 평가하고 대응 방안을 제시하며 교회를 수호하고자 했다.
II. 레이몬드 룰(Raymond Lull, 1235-1316)
레이몬드 룰은 중세 스페인 마요르카 출신의 철학자이자 신학자로, 아랍어와 이슬람 철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기독교와 이슬람 간의 대화를 시도한 인물이다. 그는 ‘신학적 논리’와 ‘기독교 변증학’을 결합하여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강조한 독창적인 철학적 체계를 발전시켰고 방 대한 양의 저서를 남겼다. 그는 이슬람과 관련해 중세 기독교 사상에 영향을 미쳤으며, 기독교와 이슬람 간의 논리적 논쟁에 있어서 유의미한 기여를 했다.
A. 레이몬드 룰의 생애
레이몬드 룰은 1235년 마요르카(Majorca)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레이몬 아맛 룰(Ramon Amat Llull)은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카탈루냐 가문 출신으로, 1229년 아라곤의 제이미 1세(Jaime Ⅰ of Aragon, 1213-1276년 재위)가 마요르카를 사라센으로부터 수복하는 과정에서 정부군으로 참전해 탁월 한 공을 세웠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정복지의 땅을 하사받았다. 마요르카는 아프리카와 유럽을 잇는 서구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로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으로 약 300년간 이슬람 세력에 넘어가 있었으나 제이미 1세가 사라센과의 전투를 통해 마요르카의 대부분 영토를 회복했다. 마요르카의 수도 팔마(Palma)는 여러 곳에서 모여든 기독교인들, 무슬림들, 유대인들이 섞여 사는 서구의 국제적인 도시 중 하나였다. 안토니 보너 (Anthony Bonner)는 섬 인구의 3분의 1이 무슬림이었고, 이들 대부분이 노예였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룰은 1257년 카탈루냐 가문의 블랑카 피카니(Blanca Picany)와 결혼하여 두 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는 제이미 2세(Jaime Ⅱ, 1291-1327 재위)의 궁정에서 집사직을 맡았는데, 궁정의 집사는 높은 직위로서 궁정의 예전과 잔치를 총감독하는 직책이었다. 룰은 생애 초기 30년간은 세속적인 삶을 살며, 아라곤 궁정의 풍습에 따라 많은 정부들을 두었다. 그러나 1263년 아라곤 궁정에서 회심을 경험한 후 그의 모든 것이 바뀌었다. 룰은 세속적인 생활을 버리고, 가족이 생존할 수 있는 것만을 남긴 후 모든 재산을 팔았다. 그는 비기독교인 특히 무슬림을 위한 선교에 헌신하도록 하게 요청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환상을 반복적으로 경험했다. 그의 회심은 완전했고, 이후 50년 동안 헌신적으로 주님을 섬기는데 삶을 바쳤다. 신앙심이 없는 그는 뜨거운 열정과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9년 동안 공부에 전념했다. 그는 아랍어를 배우며 성경과 탈무드뿐 아니라 꾸란을 읽었고, 그 리스 철학을 배웠으며, 약간의 의학적 지식도 습득했다. 룰은 아랍어를 익히고 이슬람에 대해 알기 위해 무슬림 노예를 샀다. 그가 수피즘(Sufism)에 대해 알고 있었으며 그 영향을 받았다는 몇몇 증거가 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여러 곳에 아랍어와 히브리어 학교를 조직한 도미니카 수도회의 페냐포르트의 라몬(Ramon de Peñafort)의 영향을 받았다. 룰은 1275년 그동안의 연구를 바탕으로 첫 번째 책인 『주요 학문』(Ars Major)을 출판했고, 1276년에는 제이미 2세로부터 아랍어와 이슬람 연구를 위한 학교 설립에 대한 지원을 가까스로 받아냈다. 룰은 배를 타고 여행하며 글을 쓰고, 정부와 교회가 아랍어와 이슬람에 대한 연구를 더 지원하도록 독려했으며, 스스로도 무슬림과 토론하면서 복음을 전하고자 시도했다. 룰은 십자군 원정의 인기가 높았던 12세기에, 그리고 그 인기를 잃어가고 있던 13세기에 글을 썼다. 13세기 십자군 원정의 4분의 3은 이집트 또는 튀니지에서 끝을 맺었고, 1291년에는 성지에 기독교 거점이 하나도 없었다. 이슬람과의 무력 투쟁에서의 실패는 설교를 통한 접근 방법에 대한 룰의 비전을 더욱 강력하게 촉진시켰다. 이는 룰이 무슬림의 개종과 성지의 탈환 모두를 달성하는데 있어서 보다 성공적인 수단이 될 것이라고 교황에게 주장했던 방법이었다.
B. 레이몬드 룰의 이슬람 이해
룰의 주요 관심사는 이슬람이었지만 그는 매우 넓은 분야에서 다방면으로 글을 썼다. 자료에 따르면 그의 저서는 265권으로 보고되고 있다. 그는 선교사뿐만 아니라 철학자, 신비주의자, 카탈루냐 산문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또한 그는 기독교 변증가요, 선교사 훈련을 위한 동방언어 학교의 설립자이기도 했다. 룰이 이렇게 많은 이력과 작품을 남긴 역사적 배경에는 그가 태어나고 자란 13세기 지중해 유역에 위치하여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 사에 집중적인 교류가 있었던 마요르카가 있었다. 세 종교가 공존하는 다문화 지역에서 성장한 룰의 생애와 작품을 관통하는 원동력은 그가 만나는 유대인과 무슬림을 기독교로 개종시켜 모든 사람이 하나의 신앙을 가지게 하는 것이었다. 룰의 초기 작품으로서 9년 동안 아랍어를 공부하면서 이슬람에 대한 연구를 한 후에 저술된 『이방인의 책과 세 현자의 책』 (Liber de la Entilitate et de la Tres Sages)은 이슬람에 대한 룰의 이해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이 작품은 룰의 모국어이자 당시 서지중해 지역의 공용어였던 카탈로냐어로 씌여졌다. 이 작품을 통해서 이슬람에 대한 룰의 견해를 살펴보고자 한다.
1. 『이방인의 책과 세 현자의 책』의 구조와 내용
이 작품은 먼저 등장인물을 소개하고 논증기술과 대화 방법을 제시한다(p.5-14). 1장에서는 세 현자가 이방인에게 하나님의 부활과 존재를 논증한다(p.14-46). 2장에서는 유대인 현자가 유대교 신앙의 우월성을 밝히고(p.47-87), 3장에서는 기독교인 현자가 기독교 신앙의 우월성을 설명하며(p.88-158). 4장에서는 무슬림이 이슬람의 신앙의 우월성을 설명한다 (p.159-198).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방인의 기도에 이어서 세 현자가 일치에 도달할 때까지 대화를 지속하기로 약속한다(p.199-211). 작품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하여 전체 그림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작품은 한 이방인에 대한 소개로 시작된다. 그는 지혜로운 사람이지만 신을 알지 못하고 부활을 믿지 않는다. 그는 인생과 죽음을 생각하다가 슬픔에 잠긴다. 이 슬픔 을 치유하기 위해 떠난 숲에서 그는 도시에서 공부하다가 산책을 나온 세 현자를 만난다. 세 현자는 유대인, 기독교인, 사라센인이다. 그들이 각각 자신의 종교가 가지고 있는 우월성을 설명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방인은 중요한 대화 규칙을 한 가지 제안한다. 그것은 그들 중 누구도 다른 사람이 자신의 종교를 소개하는 동안 반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반론은 사람의 마음속에 적대감을 야기해서 이해력을 저하시키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대화는 세 현자가 차례로 논증하고, 이방인만이 현자들의 근거에 대해 대답하는 방식으로 진행하기로 정해졌다. 이것이 1장의 내용이고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세 종교에 대해 각각 설명한다.
2. 이슬람에 대한 무슬림의 신앙과 변증
사라센인은 마지막 발언자로서 12개의 신앙 조항을 논증한다. ① 유일신, ② 만물의 창조주, ③ 무함마드는 신의 예언자, ④ 꾸란은 신의 말씀, ⑤ 한 천사가 죽은 자에게 무함마드가 신의 예언자인지 묻는다. ⑥ 신을 제외한 만물은 죽는다. ⑦ 부활은 일날 것이다. ⑧ 심판 날에 신은 무함마드의 기도를 들어 주실 것이다. ⑨ 모든 이들은 하나님에게 셈을 할 것이다. ⑩ 공로와 과오는 저울에 달아질 것이다. ⑪ 낙원과 지옥으로 인도하는 길 ⑫ 낙원과 지옥이 존재한다.
사라센인은 기도(살라트) 전 관습대로 세정의식을 행하고 비스밀라(bismillah)와 다른 기도문들을 낭송함으로써 그의 강의를 시작한다. 하나님의 단일성으로 변증을 시작한 사라센인은 이것이 이슬람의 주요 교리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이 주제를 집요하게 지속적으로 논증한다. 타우 히드의 원칙에 대하여 이방인은 이슬람과 기독교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음을 인식한다. 사라센인의 두 번째 요점에서 그는 하나님이 창조주라면, 하나님이 선만이 아니라 악 또한 창조했는지에 대해 질문을 받는다. 그는 이것이 이슬람의 주장임을 인정하고 철학적 정교함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는다. 사라센인은 계속해서 무함마드에 대해 말하면서 그를 메카와 메디나의 선지자로 묘사한다. 여기서 무함마드의 율법은 모세의 율법과 “하나님의 영”이며 “거룩한 동정녀에게서 태어난” 예수의 율법과 동일 선상에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무하마드는 그의 추종자들을 위해 중재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아담, 노아, 모세, 예수를 포함한 성경의 예언자들이 묘사되는데 그들 중 누구도 중재자가 될 수 없다. 무함마드만이 선지자가 된 후 죄를 짓지 않는 유일한 선지자라는 사실이 강조된다. 이것은 모든 선지자들은 죄가 없었다는 꾸란의 가르침에 위배된 다(꾸란 3:161). 다시 한번 이방인은 사라센인이 채택된 철학적 체계를 사용하는 방법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사라센인은 낙원을 오감으로 묘사한다. 이는 예상대로 낙원에서 ‘여자와 동침하는 것’의 가치에 대한 논쟁으로 끝이 나는데 사라센인은 “남자가 더 정의로울수록 더 많은 여자와 동침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라센이 낙원의 육체적 쾌락에 대해 언급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3. 이슬람에 대한 룰의 주장
룰은 사라센인의 담화 중 두 번째 부분에서 다음의 두 주장들을 주로 전개한다. 첫째, 사라센인은 지적인 정교함이 부족함을 입증한다. 그는 이전에 기술한 내용을 근거로 무슬림들이 철학이나 자연과학을 공공연하게 배울 수 없었다는 것을 지적한다. 논리학과 철학에 근거한 방법론을 가진 룰에게 이 사실은 기독교의 우월성에 대한 이슬람의 지적 굴복과도 같은 것이었다. 둘째, 룰은 사라센의 진술을 토대로 낙원의 육적인 쾌락을 반복해서 강조한다. 그는 현세에서 가장 순결한 자가 가장 많은 여인과 동침할 것이며 그 여인들은 낙원에서 남자들에게 복속될 것이라고 역설한다. 룰은 육적인 낙원은 필연적으로 음식의 소비와 성교의 결과로 “타락(filth)”을 만들어 낼 것이라고 극단적으로 주장하는 경향을 보인다.
룰의 목표는 사라센인의 개종이었다. 전 인류가 “하나의 신앙, 하나의 종교, 하나의 종파”를 공유하는 그 날을 바랄 때, 이것이 기독교 신앙이어야 한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비록 방탕한 과거를 지녔다 할지라도 중세 기독교인으로서 낙았고, 그의 논쟁적인 목적을 위해서는 이를 과장하기도 했다. 그는 이슬람을 격렬하게 비판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효과적인 무기라도 사용하는 데에 주저함이 없었다. 콜로머(E. Colomer)에 따르면 룰은 사상가이기 이전에 선교사였다. 이성은 비기독교인에 대한 선교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으며, 그 목적을 실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성은 봉 사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그의 저서 『주요 학문』에서는 그가 지속적으로 추구한 목표가 달성되었다고 보았다.
룰은 이슬람을 기독교 종파 중 하나로 보지 않고, 타당성은 없을지언정, 유대교 및 기독교와 동등한 위상을 가진 종교로 보았다. 세 현자는 입을 모아 이방인에게 “우리는 신앙과 종교가 다르다”라고 말한다. 책의 나머지 부분은 “그들 중 무엇이 참 길이고 무엇이 잘못된 길인지” 결정하려 는 시도로 구성된다. 룰은 클뤼니의 베드로(Peter the Venerable, 1092-1156)와 같은 중세 기독교 신학자의 견해와 대조적으로, 이슬람을 기독교 이단으로 치부하기보다는 그 자체의 장점을 진지하게 다루었다. 룰은 이슬람을 기독교 이단으로 취급하면 그 중요성과 심각성을 감소시킨다고 보다. 기독교 이단으로서의 이슬람 이해는 이슬람을 익숙하고 극복할 수 있는 장애물로 판단하는 것을 의미했다. 룰은 십자군 원정이라는 서구의 뼈아픈 경험에서 비롯된 이해를 바탕으로 이러한 요인들을 인식하고, 이슬람은 그렇게 쉽게 제거되지 않으며 잘못을 저지른 자손이라기보다는 심각한 종교적 적대자로 간주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C. 이슬람 선교를 위한 조건들
룰은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교사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이라면 어떤 고난을 무릅쓰더라도 선교하리라는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동시에 선교 신학을 발전시키는 것 또한 룰에게 맡겨진 일이었다. 룰은 심오한 학자로서 당대의 철학적 및 신학적 체계에 정통하였다. 룰은 이슬람 선교를 위해 세 가지 요건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첫째, 이슬람 언어에 대한 폭넓고 정확한 지식이다. 1274년에 마요르카의 미라마르(Miramar)에 동양의 언어 연구를 위한 대학 설립인가를 왕실로부터 확보하였고, 1276년 학교가 설립되어 13명의 수도사가 레이몬드 룰의 논증법과 사상을 수학했다. 그의 목표는 신학교와 철학 학교를 설립하는 것이 아니라 해외 사역을 위한 이상적인 훈련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교과 과정에는 선교 지리학과 아랍어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세계 지역에 관한 지식』(Knowledge of the Regions of the World)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개종을 위하여 그리고 이교도와 적그리도스를 대항하기 위하여 필요하다. 지리학에 생소한 사람은 자신이 걷는 지역에 대하여 무지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어디로 안내되는지도 모른다. 이교도를 개종하려고 시도하든 혹은 다른 이익을 위해 사역하든 다른 종교와 모든 국가의 환경을 아는 것은 필수불가결하다.
1311년 비엔나 종교회의(Council of Vienne)에서는 룰의 제안에 따라 로마, 볼로냐, 파리, 옥스퍼드 등 세계의 유수한 대학들이 공동으로 이슬람 세계의 언어를 연구하기 위한 5개 단과대학을 설립하기로 결정하였다.
룰이 반드시 필수적이라고 지정한 언어는 히브리어, 아랍어, 시리아어, 그리고 헬라어였다. 그는 다른 지역에서 학식 있는 사람들이 개종을 전제하지 않고 철저한 신학교육을 받도록 해야 한다는 근대적인 제안을 덧붙이기도 했다.
둘째, 룰이 강조한 이슬람 선교전략은 체계적인 저서를 집필하여 기독교의 진리가 꾸란의 내용보다 더 진실하며 합당한 논리임을 논증하는 것이었다. 그는 십자군 운동은 검이 아니라 펜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를 위해 철학적인 체계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두 가지 생각은 선교적이었고 상호적으로 작용했다. 당시에 기독교에 대한 책을 저술해야 한다는 의견은 기독교 세계에서 오랫동안 활발하게 논의되었던 것이었다. 룰은 학식있는 무슬림들과 만난 경험을 통해 이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슬림들은 나름대로 스콜라 철학을 발전시켜왔고, 이 철학을 바탕으로 이슬람의 교리가 추호도 잘못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사 라센의 감독’(Saracen Bishop)이라고 불리던 튀니지아 부기아(Bugea)의 그랜드 무프티(Grand Mufti)는 룰에게 “만약 당신이 기독교의 교리가 진리이고 무함마드가 거짓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을 필연적인 논리에 의하여 증명하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도전했다.
셋째, 이슬람 선교의 필수 요건은 생명을 내놓더라도 자발적으로 무슬 림들과 살며 충성스럽고 용감하게 증거하겠다는 사명감이다. 이슬람법에 따라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로 간주 되는 이슬람 국가들에서 복음 전도의 일을 수행하는 것은 확실히 위태로운 일이다. 룰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선교사들은 복음전파로 세계를 개종시킬 것이다. 또 한편으로 흘리는 눈물과 피, 엄청난 수고, 그리고 쓰라린 죽음을 통해서도 세상을 개종시킬 것이다.” 룰은 자신은 실천하지 않으면서 사상만 유희하는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그는 무슬림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그들과 대면하고 1291년에는 튀니지에 가서 선교사역을 하다가 추방당했다, 1307년에는 알제리의 베자이야(Bugia)로 가서 선교하다가 6개월간 감옥에 수감되었고, 1314년 8월 14일 다시 베자이야에 들어가 약 1년 동안 작은 개종자 모임을 인도하였다. 1315년 6월 30일 그는 베자이야 시장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왕의 명령이거나 적어도 왕의 묵인하에 돌에 맞아 순교했다. 그의 시신은 마요르카의 성프란체스코 교회에 안장되었다.
D. 레이몬드 룰의 공헌
13세기의 기독교인들은 무슬림을 사랑하지도 그들의 종교를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룰과 동시대 사람인 마르코 폴로(Marco Polo, 1254-1324)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무슬림들이 기독교인들을 증오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무함마드는 이슬람에 대하여 다르게 말하는 모든 자들에게 위해를 가하라고 명령하였다. 특별히 기독교인에 대해서는 그들의 재산을 빼앗고 악한 방식으로 처리하라고 명령하였다. 무슬림들은 그런 방식으로 전 세계 에서 행동으로 옮겼다.
또 한 명의 동시대의 인물인 이탈리아인 단테(Dante Alighieri, 1265-1321) 는 무함마드가 그 사위 알리와 함께 이슬람을 창시해서 종교의 갈등을 유발했기에 28번째 지옥에서 고통받는 죄인으로 묘사하였다.
나는 많은 기사들이 무력으로 성지를 정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바다를 건너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결국 그들이 얻고자 하는 것을 차지하기도 전에 모든 것이 파괴된다. 성지를 정복하려는 시도는 사도들이 취했던 방법이 아니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즉 그것은 사랑과 기도, 그리고 그들을 위하여 눈물을 쏟는 것이다.
룰은 기독교와 이슬람 간의 신학적 대화를 시도하며, 무력 대신 학문 과 논리를 통해 이슬람 선교에 접근한 선구자적 인물이었다. 그는 언어와 철학, 종교에 대한 깊은 연구를 통해 이슬람을 이해하고자 했고, 기독교 교리를 논리적으로 설득하여 무슬림들을 개종시키려고 노력했다. 그의 선교적 접근은 당시 십자군 전쟁으로 악화된 기독교와 이슬람 관계에서 비폭력적이고 지적인 방식을 제시하였으며, 이러한 접근은 중세의 다른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하였다. 룰의 독창성은 그가 대화와 철학을 선교 도구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는 『이방인의 책과 세 현자의 책』에서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의 입장을 균형 있게 다루며 각 종교의 우월성을 논증하는 구조를 택해 종교 간 대화의 가능성을 모색했다. 반면 그의 접근법은 당시 이슬람 세계의 지적 전통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채 기독교 논리를 우월하게 전제하고 이슬람 교리를 종종 단순화하거 나 왜곡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룰의 선교적 시도는 학문적 연구를 통해 이슬람과의 평화적 교류를 촉진하고자 한 점에서 중요한 역사적 공헌을 하였으며, 이는 후대 학자들에게 기독교와 이슬람 간 대화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이정표가 되었다. 그러나 이슬람을 심각한 종교적 적대자라 고 주장하면서도 유대교 및 기독교와 동등한 위상을 가진 종교로 보는 관점은 신학적 논쟁의 여지를 남겼다.
III. 쿠사의 니콜라스(Nicolas of Cusa, 1401-1464)
쿠사의 니콜라스는 15세기 유럽의 기독교 신학자이자 철학자로, 종교 간 대화와 이슬람 연구에 큰 관심을 보인 인물이다. 오스만제국의 확장기에는 그는 이슬람을 단순한 적대의 대상으로 삼기보다는 신학적 논의를 통해 기독교의 진리를 논증하는 학문적 접근을 취했다. 그의 연구는 종교 간 학문적 대화와 상호이해의 가능성을 제시한 점에서 큰 공헌을 남겼다.
A. 쿠사의 니콜라스의 생애
쿠사의 니콜라스는 1401년 독일의 작은 마을 쿠사(Cusa)에서 태어나 하이델베르크와 파두아에서 법학과 신학을 공부하며 학문적 재능을 키웠다. 그의 초기 연구는 주로 교회개혁과 신학적 문제에 초점을 두었으나, 점차 다양한 종교와 사상에 대한 관심으로 확장되었다. 이슬람에 대한 그의 관심은 특히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제국에 함락된 1453년을 계기로 더욱 깊어졌다. 니콜라스는 이 사건을 계기로 기독교와 이슬람 간의 대립을 해소하고 평화와 이해를 이루기 위한 종교적 대화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는 이슬람을 포함한 다양한 종교가 공통의 신적 진리를 추구하고 있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기독교 신학을 중심으로 한 대화의 장 을 열고자 했다.26
니콜라스가 저술한 두 권의 책은 그의 신학적 목표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1453년에 저술된 『신앙의 평화에 대하여』(De Pace Fidei)는 이슬람을 포함한 여러 종교 간 평화를 추구하기 위해 쓰여진 책이다. 이 책은 다양한 종교의 대표자들이 천상의 대화 형식으로 신의 진리에 대한 공통의 이해를 논의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이 작품은 모든 종교가 궁극적으로 하나의 신을 섬긴다고 주장하며, 신적 지혜를 통해 평화를 모색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 저서에서 니콜라스는 기독교의 진리를 중심으로 이슬람과의 조화 가능성을 논의하며 당시 종교적 갈등 속에서 대화의 가치를 제시하였다. 1461년 저술된 『꾸란 정밀분석』(Cribratio Alkorani)은 기독교적 관점에서 분석한 꾸란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책은 꾸란의 신학적 개념과 기독교 신학을 비교하여 두 종교 간의 차이를 신학적으로 설명한다. 그는 꾸란의 유일신 개념을 언급하면서도 삼위일체와 예수의 신성을 중심으로 기독교와 이슬람의 신학적 차이를 논증하였다. 『꾸란 정밀분석』에서 니콜라스는 이슬람의 신개념과 예언자의 권위를 기독교적 관점에서 두 종교의 핵심 교리를 평가하였다.
B. 니콜라스의 이슬람 이해
니콜라스의 두 저서에 나타난 이슬람 이해는 이슬람 신학과 꾸란을 체계적으로 분석하여 종교적 대화의 가능성을 열었다는 점에서 중세 기독교와 이슬람 관계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이는 이슬람에 대한 체계적 연구가 기독교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전기를 마련하였으며, 후대 학자들이 종교 간의 상호이해를 목표로 이슬람을 연구하는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이 두 저서는 이슬람에 대한 니콜라스의 변화된 관점을 상반되게 보여준다. 여기에서는 두 저서를 비교하여 이슬람에 대한 니콜라스의 견해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신앙의 평화에 대하여』에 나타난 관용정신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에게 함락된 직후에 저술된 『신앙의 평화에 대하여』는 그 재앙에 대한 니콜라스의 반응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는 명백하게 다른 신앙보다 기독교의 더 큰 진리와 무게를 전제하지만 『신앙의 평화에 대하여』에서는 모든 신앙, 그중에서도 기독교와 이슬람의 밀접한 관계와 모든 신자가 받아들일 수 있는 보편적 종교의 형성을 고려한다.
모든 [사람은] 다양한 의식에 오직 하나의 종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이러한 의식의 차이는 제거될 수 없다. 또는 다 양성이 헌신을 증가시키기 위해 [그것이 제거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한 분이신 것처럼, 적어도 하나의 종교, 그리고 주권자이신 하나님께 대한 하나의 참 예배가 있게 하소서.
『신앙의 평화에 대하여』의 다양한 화자들은 그리스인, 이탈리아인, 아랍인, 인도인, 칼데아인, 유대인, 스키타이인, 프랑스인, 페르시아인, 시리아인, 스페인인, 투르크인, 독일인, 타타르인, 아르메니아인, 보헤미안인, 영국인이다. 그들은 함께 긍정적인 포용성, 관용, 낙관주의 정신이 지배적인 논쟁적이지 않은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토론이 아닌) 논의를 진행한다. 그래서 비기독교인이 삼위일체를 받아들이는 문제를 논의할 때, 심지어 유대인들조차 다음과 같이 긍정적으로 반응한다. “부정할 수 없는, 지극히 축복받은 삼위일체는 아주 잘 설명되었다.” 니콜라스는 결론에서 그의 보편적 종교를 영원한 평화와 연결시키는데, 그러한 종교는 종교적 갈등과 전쟁을 종식시키고 대신 화합과 일치를 확립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니콜라스는 여러 종교의 다양한 의식과 관행이 모든 종교의 신자들이 공유하는 신성한 교리의 공통적인 핵심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신앙의 평화에 대하여』는 당시로서는 혁신적이고 관용적인 종교적 포용성의 기준을 설정하고 종교 간 대화를 촉진했다. 『신앙의 평화에 대하여』는 아마도 기독교로의 개종을 해결책으로 제시하지 않으면서 보편적인 종교의 문제에 대해 공개적으로 다룬 최초의 기독교 저작이었을 것이다. 니콜라스를 이슬람 전문가가 아니라고 비판하는 노먼 다니엘(Norman Daniel)조차 도 인류에 대한 그의 개념으로 인해 그를 당대 가장 뛰어난 인물로 인정한다. 아이킨(Aikin)과 알렉산데르(Aleksander)가 지적한 것처럼 니콜라스의 이러한 태도는 “니콜라스는 종교 간 관용을 증진하려는 실질적인 목표를 대신하여 어느 정도의 종교적 다원주의를 수용하려고 시도하는 신학적 배타주의자이다”라는 비판을 받았다.
2. 『꾸란 정밀분석』에 나타난 비관용정신
이슬람에 대한 관용적인 태도의 『신앙의 평화에 대하여』와 약 8년 후 출판된 『꾸란 정밀분석』사이에서 니콜라스는 이슬람에 대한 태도를 바꾸었다. 유럽으로 밀려오는 이슬람의 군대의 위협을 그 원인으로 볼 수 있다. 『꾸란 정밀분석』은 기본적으로 꾸란을 비판적으로 읽고 논리적 논증을 통해 그 가르침을 분해함으로써 복음의 진리를 확증하려는 시도이다. 『꾸란 정밀분석』의 첫 권에서는 하나님의 유일성이 강조되고 이슬람에 대한 비판은 텍스트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지 않는다. 1권 1장에서 니콜라스는 꾸란을 비판한다. “그 책에는 그들의 비열함과 불의와 노골적인 거짓말과 모순 때문에, 신성모독 없이는 하나님께 돌릴 수 없는 가르침이 포함되어 있다.” 암묵리에 사탄은 무함마드에게 꾸란을 전달했음이 틀 림이 없으며, 따라서 꾸란에서 그리스도와 복음서에 대하여 언뜻 보기에 칭찬할 만한 언급은 모두 본질적으로 기만적이라고 보았다.
비록 [꾸란]이 성경, 복음, 아브라함, 모세, 특히 동정녀 마리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예언자들을 찬양하는 내용을 담은 것처럼 보이지만, 나중에 밝혀지겠지만 참된 구원의 끝에 대한 설명의 모든 [저작 들과 작가들]과 모순되기 때문에 이러한 찬양들은 속이기 위해 [꾸란 에] 배치된 것으로 믿어진다.
작품의 후반부, 특히 2권 29장 “꾸란에 대한 모욕”에서 변화가 일어나고 꾸란에 대한 가혹한 비판이 빈번해진다. 이는 무함마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니콜라스는 무함마드의 무지를 강조했고 “그리스도는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구원을 구하셨지만, 무함마드는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구원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영광을 구했다.” 고 비판했다. 또한 이슬람은 칼의 종교이고 이슬람의 궁극적인 목적은 이슬람에 의해 지배되는 세상으로 파악했다.
오 무함마드, 나에게 당신은 종교를 통하여 권력을 추구하는 것으로 보인다. 당신은 모든 [문제들을] 칼로 축소한다. 심지어 칼로 조공을 얻으려 애쓴다... 당신 종교의 목표, 즉 당신의 열성과 당신의 율법에 [규정된] 의식이 오직 당신이 지배하는 것에만 치우쳐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니콜라스는 『꾸란 정밀분석』에서 이슬람을 폭력적인 종파, 즉 그 존재가 칼을 행사하기 위한 구실에 지나지 않는 종교로 제시했다. 그의 “칼의 종교”로서의 이슬람에 대한 극단적인 비관용적 정의는 니콜라스가 경험한 심경의 변화를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
3. 니콜라스의 급선회된 이슬람 이해
『신앙의 평화에 대하여』의 등장과 『꾸란 정밀분석』의 출판 사이의 8년 동안 니콜라스의 이슬람에 대한 관점에는 급격한 변화가 생겼다. 1456년 여름 베오그라드 근처에서 오스만 터키에 대한 승리를 칭송하기 위해 작성된 설교는 그의 변화된 관점을 보여준다. 먼저 그는 명확하게 그리스도의 고난을 당시 기독교 국가의 원수인 오스만 터키와 연결한다. “그리스도는 신비한 몸으로 많은 고난을 받으셨고, 우리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경멸하는 가장 야만적인 오스만 터키인 메흐메드에게 더 많은 고난을 받으셨다.” 그는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배교한 기독교인을 “영이 없고 (spiritless)” 감각에 의해서만 지배당한다고 특징지었다. 그런 다음 그는 십 자가 죽음을 부인하는 교리적 차이를 강조하면서, 무함마드를 “거짓 선지자(pseudoprophet)”로 묘사하고 꾸란에 있는 복음서에 대한 긍정적인 언급을 사탄의 현혹적인 속임수로 설명한다. 설교는 당시의 지정학적 상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메흐메트 2세(Mehmed II, 1432-1481)가 헝가리를 점령하고 비엔나까지 진격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팽배했다. 비록 메흐메트 2세는 베오그라드에서 패배했지만(1456년 7월 22일), 1454년부터 1456년까지 세르비아의 영토와 자치 수단을 장악했다. 헝가리와 오스트리아에 위협을 가하는 발칸반도에 대한 오스만제국의 세력 확장은 니콜라스로 하여금 『신앙의 평화에 대하여』에서 보여준 관용적 태도를 거부하고 더 강한 어조를 선택하게 만들었을 수도 있다.
니콜라스의 초기작 『신앙의 평화에 대하여』의 유토피아적이고 평화적인 비전과 그의 중요한 후기작 『꾸란 정밀분석』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는 고려되어야 한다. 와타나베에 의하면 니콜라스가 마음을 바꾼 이유 중 하나는 교황 비오 2세와 개인적인 친분 관계가 있었다. 십자군 원정을 지지하는 그의 마음이 이슬람에 대한 그의 태도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본다. 십자군 원정의 지지는 『신앙의 평화에 대하여』에 나타난 평화적 태도와는 양립할 수 없는 반면, 호전적인 종교적 열정과 『꾸란 정밀분석』의 접근 방식은 여러모로 일관성이 있다. 본질적으로 『꾸란 정밀분석』은 이데올로기적 유사성이 반영된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니콜라스에게 있어서 『신앙의 평화에 대하여』에 나타난 관용의 정신은 『꾸란 정밀분석』의 접근방식에 자리를 내줬다.
C. 이슬람에 대한 신학적 견해
지금까지 니콜라스의 대표적인 저서인 『신앙의 평화에 대하여』와 『꾸 란 정밀분석』을 비교 분석하면서 살펴보았다. 또한 이슬람에 대한 그의 생각이 급선회한 원인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이를 통하여 이슬람에 그가 이슬람에 대해서 가졌던 신학적 견해를 세 가지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니콜라스는 이슬람과 기독교가 궁극적으로 동일한 신적 진리를 추구한다고 보았다. 『신앙의 평화에 대하여』에서 그는 모든 종교가 하나의 신을 섬긴다고 주장하며, 다양한 신앙들이 신의 본질을 다르게 해석한 결과로 갈등이 생겼다고 보았다. 그는 신적 진리가 다양한 종교적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음을 강조하며, 이를 통해 기독교와 이슬람이 상호이해의 바탕 위에서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당시 십자군 전쟁과 종교적 갈등이 빈번하던 시기에 대화와 조화를 강조한 혁신적인 견해였다. 흥미로운 사실은 니콜라스가 1427년에 주교 대표로 로마에 파견된 후, 1428년에 파리로 가서 레이몬드 룰의 저작들을 연구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룰의 저술을 통해 기독교와 이슬람 간의 대화 및 논증 방법론에 대한 관심을 더 키우게 되었으며, 이를 통해 중세 사본 연구, 문헌 비평, 기본 자료 검토에 대한 지식도 습득하였다.44
둘째, 니콜라스는 이슬람의 유일신 사상을 존중하면서도 이를 기독교 삼위일체 교리와 비교하여 기독교적 진리를 강조하고자 했다. 『꾸란 정밀 분석』에서 그는 꾸란의 유일신 개념인 타우히드를 분석하면서, 이슬람이 신을 단일한 존재로 이해하는 방식이 기독교의 삼위일체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지적했다. 니콜라스는 이슬람의 신관이 신의 복합적 속성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고 평가하고, 기독교의 삼위일체가 신적 본질의 완전성을 더 잘 드러낸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기독교 신학적 우위 를 논증하려는 시도로 이슬람에 대한 학문적 비판의 토대를 마련했다.
셋째, 니콜라스는 이슬람을 비판적 관점에서 접근하면서도 이를 단순한 적대나 배척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는 기독교적 논리와 신학적 분석을 통해 이슬람 교리의 오류를 지적했고 동시에 꾸란을 신중하게 분석하여 종교 간 학문적 대화를 제안했다. 니콜라스는 이슬람을 이해하고 논증하기 위한 노력을 통해 기독교와 이슬람 간의 신학적 차이를 조화롭게 논의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했으며, 이를 통해 중세 기독교 세계에 새로운 종교 간 대화의 모델을 제시했다.
이러한 세 가지 견해를 통해 쿠사의 니콜라스는 기독교와 이슬람 간의 종교적 갈등을 학문적 탐구와 신학적 논증으로 풀어나가고자 했다. 그의 접근은 중세 기독교 학자들에게 이슬람에 대한 체계적 연구와 이해의 필 요성을 제기하며 후대의 종교 간 학문적 교류에 중요한 토대를 제공했다.
Ⅵ. 결론
레이몬드 룰과 쿠사의 니콜라스가 활동한 시대는 이슬람의 위협이 실제적으로 존재하는 시기였다. 위협의 실제성은 이슬람을 하나의 종교로 보는 관점을 생성하기도 했고, 종교 간 대화의 대상으로 인식하기도 했다. 룰과 니콜라스는 기독교 시대의 변증가로서 이와 같은 주장을 하며 기독교 신앙을 지켜내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그들 주장의 일부분일 뿐이다. 이슬람에 대한 룰과 니콜라스의 공통적인 관심은 교회 내부적으로는 이슬람에 대한 바른 신학적 평가를 하는 것이었고, 외부적으로는 무 슬림의 전도에 있었다. 이슬람에 대하는 그들의 관점과 태도는 현대의 한 국교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룰과 니콜라스의 삶과 사역은 기독교가 이 슬람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배척보다는 학문적 접근과 대화를 통한 기독교적 사랑을 보여야 할 것과, 이슬람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가져야 할 것과, 용기있게 무슬림 속에서 선교적 삶을 살아야 할 것을 설득력 있게 제안한다. 다문화 사회로 진입하는 한국사회에서 이슬람과의 공존은 실제적 상황이 되었고, 이에 대비하는 한국교회의 선교적 노력이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이슬람에 대한 두려움과 경계’ 또는 ‘무비판적 수용’이라는 이분법적 대응이 아니라 이슬람에 대한 신학적 이해를 토대 위에 ‘함께 살아야 할 사회 구성원’ 그리고 ‘비기독교적 신앙을 가진 복음전도의 대상’으로의 접근과 교육이 필요하다. 진정한 기독교 신앙은 예수의 모범을 따라 이슬람과의 공존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웃으로 다가온 무슬림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전하게 한다. 이 시기에 룰과 니콜라스와 같은 중세 기독교 신학자들의 선교신학적 사례는 유익한 지침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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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en wikipedia org/wiki/Nicholas_of_Cusa. 접속 2024년 11월 14일.
The Understanding of Islam by Medieval Christian Theologians: Focusing on Raymond Lull and Nicholas of Cusa
Yoo, Hae Seok (Assistant Professor)
| Chongshin University | Missiology |
Abstract
This paper aims to analyze how medieval Christian theologians understood and responded to Islam, and to explore the implications of their perspectives for the theological direction that contemporary Christianity can take in engaging in dialogue with Islam. The medieval Christian world, confronted with the rapid expansion of Islam and the military conquests of the Arabs, sought to understand Islam from various perspectives, leading to the development of unique theological approaches to Islam. Raymond Lull engaged in philosophical debates with Islamic scholars to defend Christian truth, while Nicholas of Cusa sought a framework for peaceful dialogue and mutual understanding, simultaneously offering logical theological critiques of the Quran’s inconsistencies and contradictions. The theological arguments and stances of these theologians reflect the way contemporary Christianity viewed Islam and the corresponding response strategies, demonstrating various approaches shaped by the historical context. Therefore, this paper seeks to draw insights from the understanding of Islam by medieval theologians of the 13th to 15th centuries, in order to explore how contemporary Christianity can approach and engage with Islam.
[ Keywords ]
Raymond Lull, Nicholas of Cusa, Christian Apologetics, Islam, Quran, Heresy, Medieval Christianity